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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Dec 17. 2019

너와 같은 온도

거여동 백암사우나 온돌 침대 예찬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 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 그르니에의 초연한 문장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떠오르는 게 사랑이라, 할 말도 그것뿐이다. 다시 사랑타령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직진의 감정은 의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감히 사랑이라 하겠다.


내게도 허락된 사치가 있다면 목욕탕이다. 그곳 구석에 오롯이 놓인 온돌 침대, 내 사랑이다. 온돌침대를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다. 바닥으로부터 적당히 오른 대리석, 있는 줄도 몰랐다.


그 온도를 처음으로 느낀 날이 생생하다. 평소 같으면 목욕탕 안에 세신 하시는 분을 포함해 4-5명은 항상 계셔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운명의 날이었으니,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무엇의 거칠 것 없이 활개 쳤다.


카이사르에게도 자신만의 전용 목욕탕이 있었겠지. 나는 황제처럼 호기롭게, 또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윽, 브루투스 너마저’ 외치면서 탕으로 풍덩 쓰러져보기도 한다.


춤도 춘다. 노래도 부른다. 완벽한 서라운드, 우디 앨런의 영화는 진실이다.


그렇게 30분이나 지났을까. 로마가 게르만에게 밀려나듯, 나의 제국도 세신사 분을 앞세운 아저씨들의 침략을 받았다. 결국 구석으로 밀려났고, 유랑 끝에 정착한 곳이 온돌 침대였다. 나뒹구는 목베개가 아니었더라면 그곳이 침대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지친 몸을 드러눕자마자 느꼈다. ‘아니, 이건 뭐지?’ 말도 안 되는 느낌, 이 돌덩어리가 주는 말도 안 되는 온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겨울철 샤워기처럼, 왼쪽으로 살짝 툭, 오른쪽으로 툭, 탁, 애매하다 싶은 쪽으로 한 번 더, 온수와 냉수 사이의 오묘한 온도, 그 완벽한 온도였다.


또 ‘지짐’은 어떠한가. 온돌 본연의 자세를 잊지 않고 내 몸에 ‘지지미’를 전해주니, 나는 나의 조금이라도 많은 부분을 이 온돌과 닿기 위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안락함으로 데워진 몸은 노곤해지며 잠이 든다. 말로 해 버리면 너무 단순화되어 버리는 이 부적절한 감각들의 나열들.


목베개도 있다. 목덜미로 전해지는 그 치명적인 시원함, 유려한 곡선의 목침선 위에 피로로 꽉 뭉친 내 뒤통수를 문질렀다.


한달을 꼬박 다녔다. 일주일을 버티는 설렘이었다.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고문이었다. 일주일에 꼭 한 번, 온돌침대에 닿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부푼 마음으로 목욕탕에 들어섰다. 기대와 불안은 다른 말이 아니니,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이가 그 온돌 위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가슴은 내려앉고 다리는 풀린다. 얼마나 실망했던가. 얼마나 답답했던가. 진짜 거의 울 뻔했다.


나는 알았다. 이것은 질투였다. 그곳에는 나만이 있을 수 있고, 오직 나만이 누울 수 있다. 오롯이 나만 닿아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질투는 인간의 가장 잔인하고 절망적인 감옥이리라. 그것은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불안과 분노, 모두 의존하는 자의 특성이며, 원했지만 받지 못한 사랑이다.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고, 참고, 또 참았다. 참다못해 사우나에 들어가기도 했다. 눈에서는 없애도 마음에선 지우지 못해, 나는 다시 돌아왔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온돌침대에 자리가 났다. 나의 시간이 왔다. 아니, 우리의 순간이 왔다. 나는 잠시 흥분했고, 바닥에 미끄러졌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이내 물을 떠서 두어 번 온돌침대를 씻겨냈고 비누칠도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느꼈다. 아, 사랑, 이게 사랑이었구나.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다음,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창조한다. 이 사랑은 무엇인가.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랑을 알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 이런 인생을 참고 살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허탈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왜 매번 이렇게 낯선가. 그러자 불쑥 다시 불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예전처럼, 과거의 어떤 날처럼 내가 잘못 행동해서, 무슨 실수해서 벌이라도 받으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이 또 사라져버리진 않을까 무서웠다.


깨달음이란 언제나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 온다. 바로 모든 깨달음이 괴로움을 동반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사랑 때문에 괴롭지 않기 위해 무엇을 미리 깨달아야 할까. 이것은 사랑이 아님을, 한낱 집착임을, 그저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 사랑의 한계는 여기까지임을 인정해야 하는가. 결국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참으로 가당찮은 욕망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비극이나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조울증처럼 나는 다시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는 지상과제로 돌아온다. 미련함조차도 사랑이기에 내일을 기대한다. 일어나자마자 그곳으로 찾아가려 한다. ‘사랑’이라는 곳으로 찾아가는 한걸음, 한걸음,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들뜬다. 잠드는 매일 밤마다 그 따스함을 떠올린다. 그 온도가 너무나 그립다.


시인 이정하는 말했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너로 인한 죽음은 진정한 죽음은 아닐 게다. 자신을 모두 물로 채워 ‘너’와 같아지겠다는 사랑의 갈구다. 나도 같은 그와 방식으로, 따뜻한 그곳, 온돌침대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와 함께 누워, 너와 같은 온도로 살아가고 싶다”

(18.07.06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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