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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May 28. 2020

요즘 사회면을 보며

죄책감의 자극은 강력하다. 공감의 교류보다 우위에 설 때가 많다. 자극은 한 방향으로 빠르게 달리지만, 교류는 양방향으로 느리게 걷는다.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여정은 세상 어느 길보다 멀기도 하다.


하지만 죄책감은 짧다. 지은 죄 깨닫지 못한 자 많지만, 죄짓지 않는 자 없다 했다. 그 때문에 상대의 죄를 알려주기만 해도 자극을 통한 메시지가 쉽게 전달된다.


대다수의 쓰는 사람은 읽는 자에게 쓴 자의 죄책감을 알리며 그 안에 메시지를 담는다. 그리고 그동안 막연하게 바라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늦게 발견했노라 탓하며 전하며 당신은 어떠한가 묻는다. 자신의 미필적 고의에 읽는 이를 동참시킨다.


'미필적 고의'란 자기의 행위로 인해 어떤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을 인식하였음에도 그 결과의 발생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간단하게, 알고 있음에도 외면했다는 것, 무관심과 외면이 죄라는 것이다. 그렇게 읽는 이도 죄책감을 느끼며 죄인이 된다.


하지만 죄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앎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알았다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다. 저마다의 감정이 다르듯, 감정에 따른 행동도 같을 수 없다.


문제는 그런 이들 대부분이 법관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가 없기에, 죄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논리다. 죄인이 된 자가 스스로 그렇게 결정했던 것처럼, 그들도 스스로 법관이 된다. 점점 세상은 죄인과 법관으로 나눠지고 있다는 생각에 두렵다. 법봉은 가볍고도 가벼워지는 반면, 죄인들의 스스로의 죄를 늘려만 간다. 우울증 사례가 더 많아질 것 같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교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 윤리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연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점점 인간은 사라지고 있다. 보여주기라도 유행했던 힐링 유행조차 찾기 힘들다. 우리 주위에 더 많은 연민과 공감이 많아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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