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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Apr 30. 2021

나를 위한 인스타그램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순간을 찍으며

이 글은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3달 동안 매일 하루의 순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말, 나는 시간의 덧없음을 견디지 못했다. 코로나19와 함께 많은 관계가 끊어졌고, 어떤 사람 A가 됐다. 애써 힘내 일에 집중하고 즐거운 것을 찾았다. 그래도 그 어떤 허무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늦겨울의 척척함은 감정의 안개를 무겁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은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생활에서도 시련은 계속 됐다. 모든 관계에서 나의 의견은 지지받지 못했고 나의 정성은 무시됐다. 일과 가족, 낯선 이와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반대의 감정이 느껴졌다. 나의 말과 글과 행동은 신뢰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바꾸고 싶었다. 나도 인정받고 싶었고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밤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 그곳에서의 나를 떠올렸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어떻게 하면 달라질까, 무엇을 해야할까.


지금보다 더 들으려고 했고, 더 이해하려고 했고, 더 참았고, 좋은 말만 하려고 했다. 말하는 연습까지 했다. 그러면 나아질거라 희망했다.


그러나 노력은 어긋나기만 했다. 정성을 들여도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절과 배려는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다. 어리석게도 매력이 없다는 게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무해하다는 것, 고립된 개인에게는 차라리 저주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일


말이 줄어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나마 누군가와 있을 때에도 말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아닌 내가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 하는 말, 누군가와의 대화, 가는 곳, 행동, 밤에 잠들기까지 하루 내내 나는 지워져만 갔다.


그렇게 외로워졌고 매일이 심심했다. 옛 애인이 이렇게도 그리워했던 적이 없었다. 신체적, 감정적 외로움을 밀어내는 게 하루의 의무였다. 사람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 끝에 남는 건, '아 이 사람도 내가 말 걸지 않으면 끊어질 인연이구나'의 확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인연도 쉽게 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이유로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이 부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매일의 태양은 떠올랐고 나는 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하지만 기대되지 않는 나날만 이어졌다. 이렇게는 살 수 없었다.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고 말했다.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을까. 나도 손가락을 조금만 더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동안 버려졌던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1월 1일부터 시작했다. 매일 무엇을 봤거나 어딘가에 갔던  사진을 찍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특별한 피사체가 아니더라도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면 족했다. 회사 옥상에서 하늘을 찍으며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저 하늘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라고 되뇌었다. 그게 내가 사는 시간의 이유라고, 저 하늘 보려고 지금껏 살았다고.


세 달 동안 찍힌 사진을 보니 나는 연주회를 비롯한 공연 17번, 영화 1번, 전시회 2번, 골프 연습장 19번, 산책 7번, 라운딩 7번을 갔다. 하늘을 바라본 사진은 41개가 있어 자주 하늘을 봤다. 꽃나무와 꽃집 사진도 2번씩 찍었다. 우리 에디 사진은 9번 올렸다.


죽지 않았던 나는 어딘가에 있었고, 무엇을 보면 사진을 찍었기에, 빠지는 날 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살면서 기억하지 못해 지워진 날이 많았다. 슬픈 일이 있어 슬프기보다, 좋은 일을 기억하지 못해 슬퍼진다. 그래도 90일 동안 위태로운 나날 속에서 잘 버틴 내가 새삼 고맙다.




너는 너, 나는 나


90일 동안의 기록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삶은 살면 살수록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연한 발견으로 오는 것이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만으로 쉽지 않았다. 90일 동안 '게슈탈트 기도문'으로 알려진 구절들을 수없이 읽어 쓰며 바라야 했다.


게슈탈트 기도문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합니다.
나는 당신의 기대에 따라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내 기대에 따라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입니다.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겠지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게슈탈트 기도문은 신경정신 분석가인 프리츠 펄스와 그의 아내 로어 포스너가 적었다. 프리츠 펄스는 게슈탈트 심리치료 이론을 정립한 이로, 진심 없이 타인을 기대에 따르는 삶은 곧 자신을 죽이는 삶이라 말한다. 그리고 자살로 이어지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각자 현실에서 중요한 것을 스스로 이해해야만 진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한 아들러 심리학과 유사하나, 지향점이 다르다. 아들러는 '자존의 완성이 관계의 시작'이지만, 펄스는 '현실의 자각을 통한 관계로부터의 독립'이다. 나를 채우는 게 아니라, 부족한 나를 봐야한다는 의미다.


사랑으로 빗대자면, 아들러는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한다'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프리츠는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사랑이다. 기도문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


진정성 있는 삶을 위한 게슈탈트 심리 치료의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지는데, '여기와 지금'이 핵심이다.


1단계, 과거, 미래를 지우고 오직 '여기와 지금'만을 생각하기, 2단계, '여기와 지금'의 경험에 집중하기, 3단계는 '여기와 지금'의 경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실수를 받아들이고 후회하기 않기다. 이 과정에서 나 이외의 타인과의 관계는 '여기 지금'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없애고, 현재의 순간에 초점을 맞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깨달았을 때, 그런 내가 선택한 삶만이 오로지 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된다. 그 순간, 사람은 책임과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게 게슈탈트의 치료다.


결국, 나는 90일 동안 나를 게슈탈트 치료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 내가 본 것, 내가 간 곳을 찍으며 나의 '여기 지금'을 바라봤다. 기대하고 기대받을 관계, 어쩔 수 없는 관계는 계속해서 버렸다. 아마 나에 대한 기대도 없었을 것이기에, 내 기대를 버리기만 하면 됐다.


게슈탈트 이론에서는 자신이 무력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생각과 감정을 통제한다면, 역할과 행동을 변화할 수 있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단계까지 의도한다. 나는 겨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본다.


이제 더 이상 인스타그램에는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사진은 때때로 찍고는 있지만, 한동안은 순간의 느낌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 느낌은 글로 남기고자 노력 중이다. 더불어 게슈탈트 이론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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