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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May 27. 2020

아리아드네의 실

삶의 길을 헤매지 않을,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표시


- 너는 언제 사랑이 끝나는 거 같아?

- 음,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런 비슷한 기분은 있어요.

- 어떤?

- 그 사람이랑 같이 걷던 길, 자주 가던 카페, 된장찌개 집, 냉면집, 버스정류장이 있잖아요. 같이 앉았던 자리, 농담들, 먹었던 음식들. 연애시대 드라마에서 나오는 던킨도너츠 같은. 거기서 손예진이랑 감우성이랑 맨날 보잖아요. 

- 근데?

- 헤어지고도 자주 가던 곳, 갈 때마다 옛날 기억나는 그런 곳. 그런데 기억들이 어느 순간 싹 사라지는 때가 있어요. 뭐랄까, 생동감? 같은 거, 그게 느껴지지 않아요.

- 생동감?

- 네. 그렇더라고요. 그때 사랑도 끝나는 것 같아요. 선배는요?

- 나?

- 네. 선배는 언제 끝나는 것 같은데요?

- 나도 너랑 대충 비슷해. 잃어버린 약도 같은 거랄까. 우리들 네이버 지도 앱이 나오기 전에는, 그러니까 다들 스마트폰을 쓰기 전에는 맛집이나 어디 찾아갈 때 ‘기억’해서 갔잖아.

- 그랬죠.

- 난 길치거든. 아무리 봐도 몰라. 그냥 모르는 거야. 저번에는 잠실역 안에서도 길을 잃어버렸잖아. 그래서 초행길은 항상 메모지에다가 약도를 그려서 찾아가야 했어.

- 그게 사랑이랑 뭔 상관이에요? 

- 데이트할 때도 약도 그려서 다녔거든. 암튼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나서, 얼마 뒤에 내가 장소를 잡아야 하는 약속이 생겼다, 근데 걔랑 갔던 초밥집에 가고 싶은 거야. 근데 기억이 안 나. 

- 뭐가요? 

- 그 초밥집 가는 길. 약도 없이도 갈 정도로 많이 갔는데. 헤어지고 나니까 잊어버린 거야. 머릿속 약도가 희미해져서. 딱 느꼈지. 아, 사랑이 끝났구나, 싶더라고. 

- ‘다시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어이없는데 그럴싸하네요. 그래서 이걸 지금, 여자 친구한테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잘나셨어요. 네이버 지도로 잘 찾아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 널 알기 전의 세상은 기억나지 않아. 너와 헤어지면, 그때 내 세상은 사라지고 말 거라고.

- 다른 여자들한테도 그런 말 하고 다니셨어요? 그러셨어요?

-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얼른 초밥을 먹으러 갑시다.


나는 그 아래 뉴욕 가를 따라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이 황량하게 굳어 있었다. 심지어는 저쪽, 센 강의 반대편에서 바라보곤 했던 에펠탑, 평소에는 그토록이나 마음을 가라앉게 해 주던 에펠탑마저도 메마른 쇠붙이 덩어리같이 보였다.(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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