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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Sep 04. 2023

흰 티와 청바지, 그리고 샌들

삶이 단순해질수록 욕망은 날카로워진다

이제 저녁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조금씩 여름이 물러가고 있다. 금방 또 '가을인가' 싶을 때 추위가 찾아오겠지만 봄이 기억나지 않는데 겨울을 상상할 여유는 없다.


온도가 달라지니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사람들의 옷차림이다. 오늘 지하철을 타니 긴팔 외투가 눈에 보인다. '아직은 덥지 않나' 싶다가도 환절기 감기가 무섭다는 생각에, 가을 옷 걱정부터 든다.


이번 여름이 시작되기 전, 그때 나는 온갖 것들을 내던지고 있었다. 1000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지웠고, 언젠가 읽겠지 하는 책들을 버렸다. 옷도, 구두도 버렸다. '나중에'라는 수식어가 붙은 거의 모든 것들을 없앴다. (여전히 많이 남았다. 몸의 짐은 마음의 짐이기도 하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애매한 옷들은 다 버리고 나니 입을 옷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로나마 지오다노 흰 티 세트 두 개를 샀는데, 여름 내내 입고 말았다. 바지는 청바지와 면바지, 그리고 테바 샌들만 주궁장창 신었다. 양말도 신지 않았다. 양말 신은 날은 누군가의 결혼식뿐이었다.


이렇게 생각 없이 그것만 매일 입으니 정말 편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늘은 어제와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오히려 예쁜 옷을 사기도 했다. 예전이었다면 평소에 입지 못할 테니 고르지 않았을, 하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샀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야 조금 옷 사는 재미를 알 것 같다. 지나고 나서 보니 일상복으로도 충분히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추워지면 이 흰티들은 어쩌지 생각하면서, inner로 입을까 하다가 그냥 버리기로 다짐했다. 조금이라도, 아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이제 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나를 이루는 것들을 버리고 비워내, 또 만들고 채워, 다시 다듬고 깎아내는 여정이다. 삶이 단순해질수록 욕망은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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