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우의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를 읽고
오랜만에 운전을 했다. 망원에서 수서로 오는 강변북로는 열리듯 막혔다. 차들 너머로 하늘색과 그 넘어 강물색은 같았다. "금방 어두워지겠네" 혼잣말을 하며 조성모를 듣는다. 오늘은 집에 가면 시를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땐 저녁을 관찰한다
세상의 혈관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가는 자의 뒷모습이 묻혀
배고픔을 잊을 때까지
-젓가락질 가운데
밥을 챙겨 먹고 몇 명과 몇 통의 연락을 나누고 책장에 서서 시집들을 보다가 최현우를 집었다.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오늘은 날씨가 따뜻했다. 굳이 차를 끌고 나가길 잘했다 생각했다.
날씨는 많이 헐거웠습니다
일찍 얼굴만 내민 계절을
다만 꽃의 잘못으로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죽은 꽃잎들을 유리병에 담아 가져왔습니다
-헌팅트로피
이 시집은 서른이 된 시인이 스물을 돌아보며 펴낸 모음집 같은 것이다.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을 모아 치워 둔 것일 수 있고, 애써 가져가고 싶어 담아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서른 건너왔고 마흔을 건너는 나였다면 전자일 것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나는 이 시집을 처음으로 집은 게 아니다. 시집 속 몇몇의 페이지는 모서리가 접혀 있다. 서른 어느 날의 내가 접어둔 것일 게다.
나는 복원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뚫고 메우다 보면
처음의 벽은 이미 사라진 벽
우리는 어둠을 갱신하며 서 있다
-회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영영 지워진 것과도 다름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모아 치워뒀다는 의미는 곧 마음도 없이 버릴 수 있다라는 걸. 용기 없는 자는 시간에 기대어 살아간다.
영혼에 홈이 가득 패어 있는 사람은
매일 밤 마음과 시간을 반대로 돌려 끼우려 했던 사람이다
-남다, 담다
자신의 시를 자신이 읽는 느낌을 조금은 안다. 나도 내 글을 가끔 읽는다.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 날은 오래됐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나로만 되어 있지 않기에 불쑥 '너'라는 사람이 등장하곤 한다. 퇴고는 그걸 지워내는 과정이다.
빛을 담았어
당신에게 주려고 했어
내게 가장 밝은 것은
두들겨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렸으므로
그걸 담아 팔려고 했어
-와디 럼
무릇 시 읽기란 쓰이지 않는 여백을 채우는 일이다. 한참을 읽어도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있었고 도저히 읽을 수 없어 넘겨버리는 페이지도 있었다. 그렇게 저녁은 밤이 됐다. 모두 넘기고 나니, 생각보다 많은 페이지 모서리 끝을 새롭게 접었다. 또 접혀있던 모서리를 펴기도 했다.
어느 날 네가 망가진 날개를 들고 서 있겠거니
다시 만날 때까지
숨은 낮게 두근거리겠고
기억은 가두는 일만 하다가 문을 잃겠다
-자동 나비
그 옛날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최현우를 읽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짐작한 건데 그때도 조금은 슬펐던 것 같다. 그때의 내가 모서리 접어둔 페이지에 적힌 시 한 구절은 조금 애처롭다.
불행은 편지였다
언젠가는 도착하기로 되어 있고
언제 올지는 몰랐으므로
-컵
또 이렇게 적힌 페이지의 끝도 접혀있었다.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밤이 온다
-멍
다 읽고 나서 덮고 나니 모서리를 폈는지, 그대로 두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찾지 않기로 한다. 날이 좋았던 날의 저녁에 강을 건넜고 밤을 기다리며 읽었던 시집이다. 올해 첫 시집이기도 하다.
물은 빛에게만 혈관을 빌려준다
반짝거리는 모든 세상에는 좋은 슬픔이 있었을 거다
-깨끗한 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