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동 디웨스트바버샵 리뷰
신지운 바버는 레슬링 선수 출신이다. 레슬링의 어원은 고대 영어 'westlian', 비틀다에서 유래했다. 비틀기 위해 살과 살을 닿아 붙잡고 넘어뜨려야만 한다. 그게 레슬링의 처음과 끝이다. 경기에 필요한 건 그저 몸과 그 몸이 구를 바닥뿐이다. 도구는 필요 없다.
바버가 된 레슬러는 이제 가위와 바리캉을 든다. 평생 닿았던 살은 멀리 3센치, 가깝게는 1미리 거리를 두고 겨우 스치기만 한다. 대신 살 위에 자라난 머리카락을 잘라낸다. 장가위, 단가위, 큰 바리캉, 작은 바리캉으로 살 위에 검은 것들을 쳐낸다. 평생 잡아 당기고 밀며 비틀었던 그는 이제 스쳐 다듬고 반듯하게 하는 게 일이다.
그의 귀는 뭉개져 있었다. 정성의 증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울 수 없는 시간의 표식은 어쩌면 자신에겐 낫지 않는 멍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발이나 레슬링이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일이다. 도구를 쓸지언정 경기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위질하는 손가락 마디 사이에 또 다른 정성의 증거가 새겨지고 있을 게다.
나는 "어릴 때 운동하셨던 분들은 뭐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적어도 노력하면 된다는 걸 아는 것 같다"고 답했다. 둘 다 확신은 없다. 바버샵에는 락발라드가 흘렀다. K2와 조장혁이 나왔던 것 같고, 에매랄드 캐슬과, 그리고 장혜진이 나왔던 것 같다.
1시간 남짓 동안 가위가 수백 번, 바리캉이 수십 번 내 작은 머리통을 스쳐 지났다. 안 잘리듯 잘린, 아무리 작은 머리카락 조각이라 해도 그렇게 자른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 굳이 왜 그러냐고 묻지 않는다. 좋기만 하다고 하니 정말 좋은지도 스스로도 의심이 든다. 사실 서걱거리는 가위질 소리와 지이잉 대는 바리캉 진동만으로도 충분하다.
놀랍게도 바리캉은 표준어다. 프랑스어로 '머리 깎는 기계'를 말한다고 한다. 물론 바리깡은 비표준어다. 캉과 깡 사이에서 실존을 고민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기 드보르는 현대 사회를 스펙타클 사회라 정의한다. 스펙타클, 그 감각적 과잉 속에서 개인은 무기력해진다. 미술사학자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이러한 개인을 과장된 감정에 도취된 무비판적 주체라고도 표현한다.
그래서 스펙타클 속에서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가상이, 본질보다 외양이 우선하게 된다. 그렇게 점점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결국 복제물이 원본을 대체하게 되는 사회, 그게 바로 현대 사회가 된다. 바리캉과 바리깡 중 무엇이 원본이고 복제인지 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미니멀리즘에 끌리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멀어져 직접적인 육체의 경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펙타클을 제거함으로써 본질을 찾으려 본능적으로 노력한다.
타인에 의해 내 존재를 실감하다니. 거울 앞 의자에 앉아 떠올린 생각을 적는다. 레슬러는 바버가 됐는데, 머리 자르다 실존을 고민하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날 좋았던 발렌타인 데이 같이, 운명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