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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벗 Oct 14. 2021

성장경험의 설계자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00님은 우리 회사에서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함께 일하게 된 팀원분과 익선동에 식사하러 간 자리였다. 가명으로 '코기'님으로 불러보자. 코기님은 첫월급 타면 쏘라고 하시며 괜찮은 파스타집에 가자고 했다. 내가 식사를 제안했고 사고 싶었는데, 그녀의 강력한 의지로 결국 얻어먹고 말았다. 


빵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우리 팀의 첫 '의미대화'가 시작됐다. 회사의 내부 상황을 모두 밝힐수는 없지만 코기님은 밀접한 상담과 코칭이 필요하신 상태로 보였다. 나는 물었다. 


"코기님은 우리 회사에서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다양한 업무를 숨가쁘게 수행했기에 일이 연결되지 않고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겪고 계신 것 같았다. 


아마 이런 문제는 실무나 지원업무를 맡고 계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겪고 계실 것 같다. 각 부서의 요청으로 태스크 A, B, C, D를 숨가쁘게 쳐내다보니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수행하고 있는 업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체력이 소진돼 금방 번아웃이 올 수 있다. 


'큰 그림'을 그리며 일하는 것, 사실 자신의 비전을 가지고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직군, 직급을 제외한다면 이 문제(잠정적으로 '분절된 정체성'의 문제라고 불러보자)를 피하기는 어렵다. 아침 저녁으로 업무일지를 열심히 정리해보지만 그렇다고 조각난 정체성을 쓸어담아 뚝딱 한개로 만들 순 없다.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사수가 없이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짧거나 긴 '일의 역사'에서 자신의 미션을 발견해야 한다. 나는 대학원, 토론강사, 뉴미디어/교육 스타트업을 거치며 2개월이 넘는 구직기간 동안 미션을 발견하는 과정을 거쳤다. 간단히 그 사고과정을 공유하고 앞으로 어떻게 내 정체성을 만들어갈 것인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지속가능한 학습'을 설계합니다 


대표님과의 의견 충돌으로 뉴미디어/교육 스타트업을 퇴사했을 때, 나는 다시 구직시장에서 플랫폼, 콘텐츠,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뺑뺑이 도는 쳇바퀴에 갇혔었다. 다른 글에서도 정리한 적 있는 다양한 인연들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몸을 담아왔던 업계가 교육이며, 대학원 조교와 강사로, 프리랜서 토론강사로서 일하며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교육 철학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게 됐다. 


'철학'이라고 해서 대단한 이론이나 사상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언어로 간결하게 전달해 보편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생각은 '철학'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학습은 왜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기술과 정보의 시대, 마치 인간의 지식 총량이 증대됨에 따라서 더욱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학습능력이 뛰어난 신인류가 태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간단한 검색으로 과거에는 손도 못 댔을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많은 양질의 콘텐츠를 무료 또는 저렴한 가격으로 접할 수 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 법'을 익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구조화되고 디테일이 모두 채워진 '닫힌 지식'을 그대로 전달해 외워서 시험을 보는 문화에 익숙하다보니, 사실 '지식'이란 것은 누군가가 사실관계에 프레임과 이론을 입혀 사례를 덧붙인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경우, 지식은 저 밖에 있는 생소하고 어렵고 전문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운다는 일은 유튜브 영상을 먼저 검색하는 일과도 같다. 쉽게 풀어 설명해주지 않으면 지식을 비판적/창조적으로 참고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전문화된 지식영역에 있는 사람이라면 학습이 일상이 되었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전통이 있는 분야에서 체계적 지식을 쌓는데 익숙한 이들은, 지식의 내용뿐만 아니라 스타일과 형식에 매우 민감해지게 된다. 학자가 위키피디아를 무시하듯이,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인사이트나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기 싶다. 


이쯤되면 배우는 일은 피곤하고 힘드니 내 생계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만 배우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되고 만다. 학습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나이에 생소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정보습득을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주식투자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미친듯이 본다고 해서 학습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학습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소박하게나마 내가 만들어온 커리어의 길에서, 나는 '학습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여러가지 이유로 학업의 길을 그만두었기에, 공부가 얼마나 어렵고 때로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많은 학습자들은 습관을 개선해주고 필요한 단계에서 코칭해주며 학습경험을 큐레이션해 자기효능감을 탑재시켜줄 선생님이나 코치에게서 배울 기회를 얻기 어렵다. 실습형 토론수업을 해온 나는 누구나 토론을 잘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학습의 기회를 주기 위한 고민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에서 완성된 것이 내 노션의 소개문구이며 다수의 회사에 지원하는데 사용한 자기소개서다. '학습을 지속가능하게!'라는 원대한 꿈은 지금도 내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성장경험의 설계자'


뉴미디어/교육 스타트업에서 창업교육 스타트업으로 옮겨오면서 '지속가능한 학습'이라는 내 미션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사실 이제 업무 파악하고 조금씩 일을 해나가는 중이라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려운 고민은 먼저 시작할수록 좋다. 슬로우 씽킹은 항상 이긴다. 진리의 부엉이는 밤에 날아 오른다. 


당분간 내 일을 '성장경험 설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콘텐츠랩의 디렉터로서 내 기획과 방법론은 콘텐츠일 뿐, 교육, 코칭, 고객에 대한 진실되고 돌보는 마음 등의 요소는 변함이 없다. 아마 삶을 가장 자기주도적으로 살며 성장을 꾀할 수 있는 직업은 창업가와 예술가일텐데, 나는 콘텐츠라는 형태로 이들의 삶이 더 나은 지점으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창업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는 무엇인가?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장경험 설계라는 미션은 디렉터로서 나의 역할과도 잘 들어맞는다. 함께 일하는 분들이 회사 내에서, 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인 것이다. 코칭 방법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누군가는 팀원과 30분간의 면담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동기를 재점검하고 목표를 설정해 다시 삶의 주도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좋은 코칭과 나쁜 코칭의 차이는 사회적 임팩트로 해석해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더 나은 인간으로 커가는데 도울 수 있다'라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자신의 성장경험을 설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해 알리는 사람으로서 나의 실력은 얼마나 늘고 있는가. '저 밖에 있는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무한경쟁을 뚫고 폭풍성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성장은 멈추고 지지부진해지게 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가끔 하는 행동을 매일 한다. 그 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매일 운동하고, 양질의 콘텐츠를 접하고, 기록하고, 정리해서 쌓아나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떨까? 자신의 성장경험을 큐레이션하기 위해 어떻게 일상을 재배열해나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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