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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벗 Oct 12. 2021

나의 일은 퇴근 후에 시작된다

콘텐츠 디렉터의 행복한 지옥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은... 말하자면 행복한 지옥과도 같아요.
공부는 즐겁지만 또 너무 힘들거든요."

미국 유학을 결정하기 전에 내가 다닐 학교에 다니고 있는 선배와 잠시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일면식 없는 석사과정 후배에게 그는 참 친절하게도 이것저것 설명해주었고, 메일에도 상세하게 답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한 지옥'이라니. 근육보다 좌뇌를 더 많이 쓰며 살아가는, 아니 그럼에도 승모근만은 웨이트 트레이닝 선수 수준으로 두툼하게 갖춘 '지식노동자'들의 일상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내 직업이어서 너무나 행복하다. 그런데 회사에 출근하면서도, 퇴근을 한 후에도,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운동을 하면서도, 자고 일어나 아침에 명상의 시간을 가지는 와중에도 뇌는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앞뒤 모르고 내달리는 뇌가 그다지 성능이 좋은 것도 아닌데, '굴리다 보니 알아서 굴러가게 된' 머리는 닳고 닳아 두피에 열을 내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공부깨나 한 사람이라면 대머리를 훈장처럼 내놓고 다니는 이유가 자명해지지 않는가. 

벌써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선배와의 통화가 생각난 것은, 퇴근길에 얼마 전에 산 예쁜 보라색의 갤럭시 A52s를 들고 열심히 콘텐츠와 책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직 집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집에 가까운 도서관에 있는 책을 좀 찾아볼까? 조직문화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최근 논의를 잘 정리한 책은 뭘까?' 


'이제 체력은 생명이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정시퇴근해놓고는 또 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숨을 크게 내쉬며 재미있는 생각을 해보려고 하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치 다 말아먹은 소개팅에서 질문을 짜내듯이 생각해본다. 


'주말에 문화생활이나 해볼까? 아, 비즈니스 북클럽 하나 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님 독립영화나 보러 가볼까? 독립영화를 보면서 골목길 상권과 로컬 비즈니스에 대해 생각해볼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에 가장 먼저 쌍수 들고 환영할 나 자신인데, 이쯤 되면 조금 힘들다. 


슬로 씽킹(Slow Thinking)의 마법


사실 일이라는 것은 머리가 빨라야 잘할 수 있는 것 같다. 상황을 파악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센스도 필요하지만, 작업기억이 풍부하고 단기 기억력이 좋아서 빠르게 습득한 정보를 더 빠른 속도로 가공하고 재배열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엑셀, 워드, 파워포인트, 노션, 그리고 슬랙을 넘어 흐르는 텍스트의 양 떼를 몰고 가는 양치기처럼, 일을 잘하는 사람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서 재조립할지 판단이 빠르다. 


물론 문제는 창조적 사고다. 단순히 정보를 재배열하는 방식의 대다수의 태스크는 엄밀히 말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있는 것들의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정보의 네트워크는 바뀌었지만, 정보의 가치는 올라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 개의 노드를 더 거치면서 정보는 더 희석되어 발신자의 의도는 희미해졌다. 모든 조직에는 이런 종류의 일이 필요하지만,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단순 재가공으로는 역부족이다. 


'일상 속에서 인풋의 횟수와 범위를 늘리고 기록해 바로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기본적인 방법론은 요즘 많은 콘텐츠 마케터들이 실행해서 전파하고 있는 기법이다. 말하자면, 더 자주 낚시하고, 잡은 후에는 꼭 요리해 먹는 방식이다. 그러나 물론 더 나은 방식이 있다. 


제일 효율적인 방식은 그물망을 넓게 펼치는 것이다. 머리에 구체적인 질문을 입력한 후에 가능한 한 모든 플랫폼이나 정보 소스에서 찾기 시작한다. 어떤 형태의 콘텐츠든 별로인 것과 형편없는 것은 모두 걸러내야 하고, 좋아 보이는 것과 좋은 것, 정말 좋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조직문화'라는 주제에 대해 짧은 시간 안에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 검색 몇 번 해서 나온 책이나 콘텐츠(특정 플랫폼의 기사나 아티클 등)로 대충 모자이크 해서는 '없던 것'을 절대로 만들 수 없다. 머릿속에 입력하는 질문부터가 달라야 한다. 


빠르게 변화는 세상에서, 이미 전문화되어 책이나 논문이 나오고 있는 주제들은 벌써 한물갔거나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일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뉴미디어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언론정보학과 교수님이 쓰신 미디어에 관한 학술서나 논문은 큰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앞서가는 주제를 선정할 줄 아는 교수님, 클래식한 형태의 정보에서도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에디터가 아니라면 말이다. 


따라서 입력되어야 하는 질문은 '조직문화 관련된 콘텐츠 중 최신의 것, 가장 잘 만든 것은 무엇일까'가 되어야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조직문화 관련되어서 가장 세련된 얘기를 하고 있는 지식인/경제인은 누구일까'라고 물어보면 된다. 새롭게 접하는 지식 도메인이니 이런 질문만으로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 따라서 큰 그물 하나 챙겨서 바닷속으로 '풍덩!' 잠수하는 거다. 


새로운 주제를 공부하는 과정은 검색과 탐색을 통해 '제일 나은 콘텐츠' '제일 좋은 저자' '내 질문에 답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답은 내 머리와 몸 밖에 있으므로 리서치는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흐름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리서치를 굴리다 머리가 알아서 굴러가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과정을 슬로 씽킹(slow thinking)이라고 한다. 


영감의 기쁨과 슬픔


한편으로는 일상에 집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질문에 대해 머리를 계속 굴리고 있다는 일은 기쁘기도 하면서도 참 어려운 일이다. 메모를 하지 않으면 휘발해버릴 아이디어들이 지하철에서 떠오르는가 하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주제에 대한 반짝이는 무언가가 지나간다. 


그래서 사실 일상이 풍성해지기도 하고, 몸이 힘들 때도 있다. 어느 곳에서든, 누구와 대화하든 영감을 얻을 수 있으니 그 기쁨과 희열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이 과부하가 걸려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말은 어떤가. 왠지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계속 인풋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잔뜩 빌리고 사놓아서 책상에 포진해 나를 노려보고 있는 책들을 하나둘씩 주섬주섬 싸들고 독서실에 가지 않으면 자다가 책에 압살 당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을 좋아한다. 유일하게 쌓이는 것은 공부다. 돈도, 사람도, 물건도 다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라면 배우는 경험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또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시간을 내어 공부해야만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실 특정 직업 분야나 직무에서를 빼고는 삶의 대부분의 전선에서 후퇴하게 될 뿐이다. 


회사를 대학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과 삶은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연결하는 방식은 매우 다를 수 있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일이 '사회적 자아에 날개를 달아주는' 방식으로 삶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다. 게을러질 때 공부할 동기를 부여해주고, 접근이 불가능했던 데이터와 자료를 볼 수 있게 해 주며,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콘텐츠 디렉터를 맡고 있는 나는, 말하자면 돈을 받고 대학원에 다니는 셈이다. 학교에서는 공부한 것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가르쳤다면, 집에 돌아와서는 대학원생의 본분인 리딩과 라이팅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삶이 공부고 공부가 삶이다. 주말에도 취미라는 명분으로 새롭고 흥미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다. 무언가 계속 배 배워야 한다. 


내가 소박하게 바라는 것은 명상, 운동, 여유, 그리고 취미를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도 결국 일이 삶이 아니라 삶이 일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지루하거나 머리가 아플 땐 영감을 찾아 골목을 누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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