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같은 지옥일까, 지옥같은 천국일까
'타인은 지옥이다'
'공동체는 구원이다'
'함께 일하는 법'에 대해 두 개의 학파가 존재한다면, 아마 '지옥학파'와 '구원학파'가 있을 것이다. 각 학파에의 대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지옥학파: 함께 일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자원인 시간을 타인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나와 생각의 호흡도, 아이디어의 결도, 언어의 조밀함도, 사고의 흐름도 모두 달라 모든 지점에서 부딫히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시간을 쓰며 머리를 맞대야 하다니. 나에게 집중할 시간과 자유도, 그리고 내 능력에 적합한 인정만 주어진다면 나는 짧은 시간 안에 해당 주제 세계 최고 전문가의 뇌를 해킹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검색만 조금 할줄 알면 된다.
구원학파: 혼자 일한다는 것은 너무 외롭고 힘든 일이다. 내가 어디인지 모를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 때 함께 울고 웃으며 나아갈 수 있는 팀원이 있다면 얼마나 힘이 날까. 서로 생각과 언어가 다를지 몰라도 함께 맞추며 나아가는 맛이 있다. 최고의 동료는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닐까?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나는 '지옥학파에 잠입한 구원주의자'이기도 하고, '구원학파에 숨어든 지옥학파'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을 조금 설명한 후에 일종의 '이중스파이'인 내 입장에 대해 넘어가보자.
'회의를 꼭 이렇게 해야하나?'
'더 효율적으로 기대치를 세팅하고 소통을 큐레이션하고 핵심 결정사항을 도출할 방법은 없었을까?'
'내가 뭔가 새로운 제안을 했을 때 설득이 될 방(room)이 아니다.'
'함께 모여서 쓴 시간동안 내가 배운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자원은 시간이다. 학습, 명상, 운동, 또는 누군가와 마음을 깊게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면 내 인생 그 자체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만약 내가 갇혀버린 상호작용의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낼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잠시 숨을 깊게 쉬어 명상을 하고 생각해보자. 첫째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파괴적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간조차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동료들과 부대끼며 조금 더 친해져서 정을 쌓아서 얻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 직감은 이럴거면 차라리 제대로 놀거나, 제대로 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옥학파에 잠입한 구원주의자
사실 나는 구원주의자다. 누구나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는 회사에서 마음을 함께하며 불태울 동료를 찾고 싶다.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나누고 서로 이해할 사람. 앞으로 어떤 일을 도모한다면 계속 함께 합을 맞춰보고 싶은 사람.
회사는 일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비전과 미션을 향해 뜨겁게 불탈 수 있는 사람이 모인 집단. 언젠가는 일이 일로 느껴지지 않는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
내가 지옥학파에 숨어들어온 이유는, 이상향과 현실의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나를 구원해줄 동료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천국에서 일하고 싶은데, 가끔씩 여긴 불지옥처럼 느껴진다.
구원학파에 숨어든 지옥학파
사실 나는 원래 '타인은 지옥'이라고 생각해왔던 사람이다. '구조화된 상호작용'을 선호하는 편이다. 목적 없는 대화, 배움이 없는 대화, 감동과 재미가 없는 대화를 혐오한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라면 나 혼자 보낼 때보다 교육적 또는 감성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구원학파에 숨어든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지옥에 살고 싶지는 않다. 천국에서 다 같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박수라도 치고 싶다.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몇명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딘가에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딘가에는 스위트스폿(Sweet spot)이 있다. 공동체의 따뜻함과 홀로있음의 자유로움 사이에서 '외롭지 않게 자유를 누리며' 몰입할 수 있는 어떤 지점.
교육 쪽에서 일해온 나에게 비즈니스의 맥락에서 공동체의 따뜻함을 구현한 곳이라면 '다 같이 으쌰으쌰하는 운영사' 정도가 될 것 같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이 들어가야 하는 행사나 프로그램 운영이라는 일, 그리고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회의하거나 같은 숙소에서 머물게되는 경우도 있는 업계라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홀로있음의 자유로움이라면 아마 개개인이 전문가로 이뤄진 컨설팅이나 기능 직군으로 채워진 초기 스타트업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에디터로 일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홀로 자료를 읽고 글로 정리하며 보낸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약간 외로울 수는 있어도, 그리고 회의가 길어 힘든 경우도 당연히 있었지만, 지나치게 늘어지는 상호작용(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스위트스폿 중 하나는 '프로젝트형 전문가 조직 또는 네트워크'일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도메인에 타인이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이 없고 오히려 상호간의 배움이 흐른다. 고정된 팀이나 위계구조가 아니라 프로젝트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와 잘 맞는 팀원과 일하거나, 또는 적절히 서로가 R&R을 맞춰서 '협업이 생산적이고 즐거운 지점을 찾아'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프로젝트형 전문가 조직 또는 네트워크'가 있을까? 이런 회사에서 일하려면 어떤 전문성을 쌓아야 하나?
협업의 절망을 통과하는 용기
아마 나를 지금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자부심'과 '오만함'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절박하게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고 싶고, 나 혼자 있다면 뭔가 도전적으로 보낼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나'라는 지점에서, 그리고 '결국 빠져나갈 수 없다'는 포인트에서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느끼는 것은, 결국 '지옥을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이다'는 점이다. 어차피 시간을 보내는 '최선'의 방법은 달성할 수 없다. 최악만 아니라면 차악에서 차선정도로 만들어볼 수 있지 않나?
상황을 바꿀수 없다면 나의 것으로 만들어(own)야 한다. 그래도 무언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두뇌 훈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보내는 방법은 없을까? 팀원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더 배울 수 있는 점들은?
명상하고 또 명상하자. 내려놓고 더 내려놓자. 나는 배우는 용기다. 나는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이다. 나는 홀로 나아가는 코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