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전 혁신적인 사람의 모습이 지금까지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되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열정이 넘치고, 실행력이 높으며,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 상당히 남성적이기도 한데요, '꼭 이런 사람들만 혁신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얘기를 아담 그랜트 교수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내가 오랜 시간동안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책모임이다. 대학원처럼 정말 양질의, 그러나 혼자 읽기는 어려운 책을 하나 골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는 방식의 세미나도 좋고, 경제경영, 심리학, 교육학, 자기계발 등의 분야의 책을 읽고 또래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그래서 참여하게 된 트레바리 스타텁-비즈 모임에서는 다양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평소에 만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닌 경우도 많아서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 포스팅에서는 세 가지 얘기를 하려고 한다.
1)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느낀 점
2) 북토크 질문에 대한 내 생각들
3) 아담 그랜트의 <오리지널스>
트레바리의 비즈니스 모델과 수익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한 점이 있다. 15명이 20만원씩 내고 만나 진행되는 모임으로 지속가능한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늘 처음으로 트레바리 모임을 경험하고 나니 드는 생각을 두서없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의 일하는 사람들이 가진 고민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려지고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더라도 '타성에 젖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투자 광풍을 따라가야 한다는 일종의 군중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투자로 높은 수익을 올려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이 일종의 금메달을 따거나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수준의 성취로 인정받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창조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자 흐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정동 구조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느끼고 성장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인 것 같다. 먼저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의 샘플에서 시작해 오늘 만난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나는 아직까지 '회사의 비전에 공감하고 나는 내 일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라는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일하기 어려운 환경이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일터에서 착취당하고 자기착취하며 살아가는지 추측할 수 있는 지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까지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를 가진 사람을 별로 본적이 없다. 나는 연봉이나 투자나 경제적 자유에 대한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창조적으로 살아갈 것인지, 타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원한다.
오늘 모임에서 사용한 질문 리스트를 간략히 언급하고 드는 생각을 기록해본다.
책에서 '독창성'이라는 것이 누구나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자질이라고 설명하는데요, 동의하시나요?
<오리지널스>가 독창성의 '민주화'를 꾀하는 책이라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독창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나 '독창성은 어떤 모습인가'와 같은 뭉툭한 질문이 아니라 '창조의 방법론'이라는 예리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면 더 좋은 논의가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즉 누구가 때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길수도 있다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문제는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혁신 전략들이 사용되고, 그 중에서도 어떤 전략들이 특히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구체적인 인과 메커니즘으로 눈을 돌려 연구해 5~10개 정도의 '혁신 방법론'을 뽑아낸다면 매우 유의미한 자료가 될 것이다.
책에서는 위험관리를 위해 몰두하는 분야를 제와하고서는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인생과 커리어에서 위험 관리를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먼저 위험 관리의 목적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위험 관리의 목적은 커리어 개발이다. 어떻게하면 지속가능한 커리어 패스를 만들어가면서도 지속가능한 수입의 파이프라인을 유지할 것인가가 핵심 질문인 것. 지금 직장의 일과 사이드 프로젝트가 서로 분절될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직장에서의 일과 직장 밖의 프로젝트들이 서로 성장과 역량 강화의 선순환을 그리는 구조가 더 유의미할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창업 콘텐츠를 개발하고 창업 코치로 일하면서, 회사 밖에서는 커리어 코치로 콘텐츠를 개발하고 코칭 세션을 진행해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권력은 지위로부터 나온다. 저자는 권력과 지위를 바탕으로 '진언'하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지 않는 길을 가기 위해 더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책에서 권력이 지위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지위는 동료의 인정으로부터 온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음을 파악한 후에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아직 동료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 예를 들어 조직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 등에서 누군가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어느 정도의 시간동안 조직에 헌신해서 신뢰를 얻은 사람의 말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권력이 지위로부터 나오는 조직은 미래의 성장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지위와는 관계없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제안하고 토의할 수 있는 문화가 있는 조직이 훨씬 변화에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적응해 살아남을 것이다. 권력형 조직이 아니라 창조적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저자는 독창성과 창의력은 노력과 끈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노력과 끈기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기본적인 명제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 명제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노력 없이 이뤄진 일이 어디있나? 둘째, 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심지어 '창의력이 노력에서 나온다'는 종류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된다. 많은 사람은 노력->자기효능감->성장->노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하게 끈기를 갖고 노력하는 사람 역시 학습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명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끈기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학습에 동기가 없는 사람들, 노력하기도 두려운 사람들이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담론이 선행되어야만 창의력 노력에서 오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1만시간의 법칙'과 같이 매우 특수한 분야에만 적용되는 논의 역시 크게 도움이 안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한 전문분야에서 평생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기본적으로 제네럴리스트 및 빠른 학습자로서의 전략과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필요할 때 배워 실행하는 방식으로의 모델이 더 적합하다. 따라서 변화에 발맞추어 학습해나가는 전략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조직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문제를 제시하게 하는 레이달리오의 경영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 다니고 있는 조직의 문제점과 연결해서 얘기해보고 싶어요.
타인에 대한 비판을 강제하는 문화는 절대 건강한 문화가 아니다. 열린 토의/토론 문화, 그리고 집단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는 물론 매우 의미가 있지만, 그 방식은 개방성과 창조성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내는 것이 되어야지, 특정한 방식을 강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첫째, 폐쇄성을 지양하기 위해 동료에 대한 비판을 실명 공개로 해야한다는 원칙은 특정한 성향의 직원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내향적인 사람이나 개발, 디자인 등 언어를 사용해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주요 업무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왜 자신의 의무인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고, 그 방식이 불편할 수 있다. 둘째, 기본적으로 창조성은 '강제'와는 반대 관계다. 창조는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고, 강제할 수 없으며, 닥달한다고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리더는 관리자가 아니라 농부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어떻게 구름을 걷어낼 것인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관심, 소통, 사랑이라는 햇빛을 비춰줄 것인가.
독창성의 모습은 하나인가?
독창적인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독창적인 인재'는 상당히 단순하고 협소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정적이고, 실행력이 뛰어나며,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홀로 문제를 해결해낸다. 일종의 영웅서사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담론은 사실 미래 혁신가의 상상력을 키워주기보다는 제한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의 패권적인 '창조적 인재상'은 불가능한 기대치를 만들어내며 이와 부합하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꿈과 목표보다는 좌절과 열패감을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그의 이미지라던지, 최근 다양한 문제로 그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나기 이전의 일론 머스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혁신적 인재의 가장 대중적인 상 중 하나가 창업가나 기업가라면, 이들의 얼굴은 남성이고, 패배를 모르게 전진하며, 마치 열정과 문제해결력을 타고난 것처럼 영웅적인 서사를 펼쳐간다.
<스타트업>의 남도산 역시 흥미로운 예시인데, 미국의 기술 창업가들에 대한 대중담론과는 또 다른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있다. 여성 창업가이지만 감정적이고, 자주 흔들리며, 의지와 패기는 뛰어나지만 문제 해결력이 낮은 것으로 묘사되는 서달미와는 달리, 남도산은 천재성과 담대함을 모두 지닌 CTO로 그려진다. 드라마에서 자주 연출되는 장면은 마치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에서 보던 모습과도 비슷하다. 문제가 발생해 서달미가 갈팡질팡하고 있으면, 가호의 Running 음악 배경이 나오는 동시에 남도산이 노트북을 들고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다. 노래가 끝날 쯤 코딩이 끝나고, 도산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위의 사례들만 놓고 탐색적으로 패턴을 뽑아보자면, 창의적인 사람은 남성이며, 열정을 타고난 사람인데다가 패배를 모른다. 이러한 단순한 영웅서사는 물론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혁신적인 사고와 실행을 해낼 수 있지만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시되고 기회를 받지 못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영웅서사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자기충족적(self-fulfilling)인 것이다.
여성, 내향적인 사람, 확신보다는 의심을 가진 사람, 밀어붙이기보다는 천천히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들이 '나는 창의적인 사람인가?' '나에게는 왜 저들이 가진 열정이 없지?' '내가 성공할 사람이라면 더 강하고 포기할줄 몰라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자문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않게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담 그랜트의 <오리지널스>에서 만나는 창조적 인간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하나의 아이디에 눈멀어 밀어붙이기보다는 다수의 아이디어를 뽑아내 그 중 가장 좋은 것에 집중하고, 급하게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위험 포트폴리오를 적절하게 관리한다.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아이디어가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홀로 나아가기 보다는 함께 연대할 이들을 찾는다.
<오리지널스>의 혁신가 담론이 충분히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인 논리에 집중하고 있으며(이미 혁신을 이뤄낸 이들을 사후적으로 찬양하는) 집단이나 조직보다는 개인에 시선을 맞추고 있는데다가 혁신가는 '범접할 수 없는 창조성을 가진 이들'이라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정말로 민주적인 '혁신가 담론'이 만들어지려면 수많은 혁신가에 대한 더 폭넓고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몇 가지 질문과 포인트를 던져본다.
혁신가는 얼마만큼 여성적인가? 돌파보다는 우회를, 갈등보다는 협력을, 개인보다는 팀을 선호하는 접근이 속도와 성과를 중요시하는 일부 혁신 분야(스타트업)에 얼마만큼 적절한가?
혁신가 개인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학습 문화' '창조적 조직' '누구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할 수 있는 집단'에 시선을 돌려보면 어떨까? 집단지성의 시대, 더이상 소수의 뛰어난 혁신가만이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혁신가 개인이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묻지 말고, 혁신가들을 길러내는 토양이 어떠한지, 어떤 조직에서 평범한 인간도 창조적 인간으로 거듭나는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독창성이나 창의성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가치라고 볼 수 있는가? 창의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보다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혁신도 있다.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서 비춰지는 인간의 뇌를 해킹해 SNS에서 시간을 더 보내도록 유도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그렇다. 기업의 급성장을 주도한다는 점에서는 혁신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저해했다. 즉 '의미 있는 혁신' '지속가능한 임팩트를 가진 혁신' 등으로 더 뾰족하게 포인트를 잡아야 '혁신가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가 의미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변화를 주도하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미래의 혁신가는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담지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실행력도 뛰어나지만 공감력도 그만큼 높은 사람, 개인의 역량도 뒤지지 않지만 팀으로서 시너지를 내는 방식을 아는 사람, 높은 성과와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조직의 구성원들을 돌보는 능력이 탁월한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 혁신을 위한 그 모든 노력이 결국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일조하는 구조를 짤 수 있는 인재.
혁신은 지속가능해야 한다. 혁신가도 인간이며, 혁신을 안고 살아가는 사회도 행복해야 한다. <오리지널스가> 혁신가 담론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열정을 품고 포기를 모르는 인간만이 혁신을 이뤄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조명해 많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형태로 알렸다는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