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한 고민
정말 오랜만이네요. 책을 읽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부끄럽지만 눈물도 납니다. 최재천 교수님을 안희경 저널리스트가 인터뷰해 낸 책, <최재천의 공부>를 읽고 있습니다. 1장을 읽고 드는 생각을 어딘가 적고 싶어서 노션 페이지를 폈습니다.
평균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성장 가능성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모가 가진 각종 자본(경제자본, 문화자본, 매력자본 등)의 총체인 ‘아비투스’일 것이고, 이 자본을 가진 부모가 고심 끝에 선택한 ‘교육’일 겁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법을 배운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은 어떤 문제를 접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지식자원의 양과 질이 완전히 다를 겁니다.
문제는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재천 교수님은 "어른들이 그들[아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문제는 “인권 문제”라고 말합니다. 공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새로운 교육 방식을 고안할 수 있을까요? 교수님은 책에서 ‘체험형 학습(learning by doing)’이나 ‘프로젝트성 학습(project-based learning)’에 가깝게 들리는, 당신께서 실제로 실행하신 사례를 언급합니다. ‘환경과 인간’이라는 수업에서 특정 사회 문제를 풀기 위해 다전공의 학생들이 모여 해결책을 고안하는 방식의 ‘프로젝트성 학습’에 대해 읽으며, 스타트업을 떠올렸습니다.
서로 다른 경험과 장점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똘똘뭉쳐서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학 동아리’ 느낌이 나는 이유가 이 유사성과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이 패러다임이 지식의 주입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일깨워줄 수 있는’, 팀워크 퍼실리테이션 역할로 변화하고 있다면, 한편으로는 초기 스타트업에서 리더십의 역할도 유사하게 변해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인 리더는 없으므로,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일깨우되, 실제로 성과를 내는 비즈니스 모델이 나올 수 있도록’ 팀워크를 퍼실리테이션 하는거죠.
꼭 스타트업이 아니더라도, 어릴 때 최재천 교수님의 교수법을 경험하거나, (아마도) 명문대에서만 경험할 수 있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며, 협업까지 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성인, 특히 주니어 직장인을 위한 성장 솔루션은 없을까요?
최근에 유행하는 성인 대상 직무교육 제품은 직무 중심일뿐만 아니라, ‘공포 마케팅’ 전략도 활용하고 있어서 아직 ‘성인교육’이라는 패러다임을 더 혁신할 수 있는 충분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미디어 습관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학습 습관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더 잘 협업할 것인가. 어떻게 일상을 혁신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성장’을 해킹할 것인가.
콘텐츠와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넘겨받게되는 미션은, 어쩌면 교육이 실패한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자율성과 창의성을 일깨워주되, 그 경험이 예술적으로 아름답고 수준 높은 것일 수 있을까요. 많은 2030 성인들에게 자신의 삶의 ‘성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할 수 있을까요.
커뮤니티, 소셜리딩, 문화예술 프로그램 등의 영역에서 매우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써볼만한 플랫폼, 프로덕트가 많고, 참여해보고 싶은 프로그램도 참 많습니다. ‘비일상적’인 지식, 문화, 예술 경험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는 시장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습관 형성을 구독하는 챌린지형 프로덕트도 이미 시장에 한두개가 아닌 것 같고요.
그럼에도 저는 자꾸 대학원 세미나 교육과, 제가 철학, 이론, 세미나 토론 등에서 경험했던 순간들이 계속 떠오릅니다. 지평이 넓어지고, 완전히 다른 지의 영역에 다른 것 같은 ‘까치발’의 순간들. 책만 읽으며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해줬던 순간들. 이 경험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 8시간 고군분투하며 일하는 젊은 주니어분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을까. 삶을 바꿔놓는 ‘성장’의 커뮤니티를 한국어권에 있는 모든 젊은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조교로 일하며 학생들에게 수업에 대한 좋은 코멘트를 받을 때, 에디터로 일하며 만들었던 뉴스레터에 감동과 감사의 메시지로 가득한 장문의 답변을 받았을 때, 비즈니스란 것이 ‘세상에 없던 경험’을 스케일로 제공할 수 있는 정말 엄청난 방법론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감정이 계속 떠오릅니다.
정말 대단한 세상입니다. 세계적 석학의 생각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습니다. 학문환경이 척박하다는 한국에서도 양질의 학술 강연이나 북토크를 줌으로, 무료로 들을 수 있어요. 새로운 문화예술적 경험을 저렴하게 플랫폼에서 구매할 수 있어요. 재미있어보이는 전시나 행사도 많습니다. 이 모든 지식과 지혜와 경험에 접근하기 위해 써야하는 시간과 돈을 더욱 줄여줄 수 있다면. 나쁜 조직문화 때문에 성장의 길이 막혀버린 주니어가 지식, 지혜, 경험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면.
[1부까지 발췌문]
삶을 즐길 권리
“저에게는 엉뚱한 꿈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너무 황당해서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촛불집회를 하나 기획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을 모두 불러모아 함께 촛불을 들고 싶습니다.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을 입시학원에 보내지 맙시다.”
“우리 모두 이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되찾아줍시다.”” 8쪽
“진정한 인권 회복은 학생으로 사는 기간도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비로소 실현됩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까지 치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거의 20년을 학생으로 삽니다. 인생 100세 시대라서 예전보다 오래 사니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인생의 첫 5분의 1을 다가올 인생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게 인권 차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인생의 전체를 온전히 사람답게 살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9쪽.
“우리가 MZ세대라 부르는 우리 아이들은 이미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걸맞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 옛날 부모 세대가 받은 교육을 생각과 행동이 근본적으로 다른 자식 세대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우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 바꿉시다. 과감하게. 근본적으로.” 10쪽.
1부. 공부의 뿌리: 누구나 꽃피울 잠재력이 있다.
“제가 가장 많이 쓰는 문구가 ‘공부하는 줄 몰랐는데 배웠더라’예요. ‘자, 이제부터 공부하자’가 아니라 재미있게 논 거 같은데 뭔가를 배운 느낌을 갖게 하는 거죠. 아이들과 같이하는 분교 수업에서 그 철학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을 앉혀놓고 칠판에 ‘기후변화란’ 이런 거 쓰지 않아요. 그저 산에 오르고 들판을 함께 거닐면서 이야기합니다. 누가 풀이라도 뜯어 오면 둘러앉아서 그 풀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면서 뭔가를 깨우쳐 가는 걸 가장 좋은 공부라고 생각해요.” 40쪽.
“저는 그 아이들과 한 시간 10분 가량 서로 질문하고 답하며 신나게 몰입했거든요. 제 수업을 뒤에서 지켜보던 담임 선생님이 넋이 나갔어요. ‘우리 아이들이 원래 이랬나?’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가르치고 어울려 탐구하는 걸 좋아합니다.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아쉬움이 많은데, 우리나라 대학이 교육을 너무 등한시하고 연구 성과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교수라면 잘 가르쳐야죠. 교육 속에서 학생은 피어납니다.” 41쪽.
[안희경] “칙센트미하이 선생팀도 저에게 “교사는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당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학교는 헝가리 시골에 있는데, 여러 학년이 한 교실에서 그룹별로 수업을 하면서 윗반이 아랫반을 가르쳐주며 서로 배우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칙센트미하이 선생님이 그 방식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서로를 돌보는 보살핌을 발현시킨다는 점인데요, 학교에 오면 윗반 선배들이 아랫반 후배들의 외투를 벗겨주고 신발 끈을 풀어주고, 수학도 6학년이 4학년을 가르치고 5학년이 3학년을 이끌어준다고 합니다. 그럼 교사는 뭐 하느냐 물었더니, 판을 벌이고 그저 바라보면 되는 거래요. 교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서로 소통하게 하는 거니까 그만으로 충분하다고요. …
[최재천] 제가 지금 교육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세 번째 이유를 말해야겠네요.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도대체 삶이 뭔데, 이렇게 학교와 학원을 돌도 돌며 살아야 하나?’ ‘무엇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무엇을 성취해야 하기에 쉼 없이 배워야 하나?’ …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내용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일까요? 솔직히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삶의 중요한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시간을 우리가 지금처럼 빼앗아도 될까?’ 자주 의문을 가져요. 저는 어른들이 그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인권 문제라고 보는데요. 청소년 시절에는 왜 인권을 보호받지 못할까요?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기성세대가 청소년에게 ‘삶을 접고 공부만 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교육제도는 위 세대가 아래 세대를 압박하는 장치가 됐습니다. 이제라도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고민하고, 모두가 삶을 즐기면서 자라나도록 길을 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교육하고 공부하는지를 숙고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45-6쪽.
“하버드대학교에서 조교를 할 때 제 역할은 수업에서 토론을 이끄는 일이었습니다. … 첫 수업 날, 저는 기존과 달리 운영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몇 번 말했는가를 기록하지 않고 학기말에 누가 가장 즐겼는가를, 토론의 질을 따져 점수를 매기겠다고 했어요. … 놀랍게도 제가 여러 차례 베스트수업조교상을 받았어요. 제 토론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편안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뽑아줬습니다. … 교육은 아이들이 지닌 잠재력이 드러나도록 과정을 다듬고, 흥미가 일어나도록 누구에게나 기회를 줘야 하죠. 모르는 사이에 공부하고 있듯이 마음이 우러나도록요.” 66-7쪽.
“제가 15년 동안 꾸준히 가르친 과목이 ‘환경과 인간’이라는 수업이에요. 그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레 학생 모임이 탄생합니다. 졸업해서도 이어가더라고요. 여러 모임에서 꽤 오래 ‘환경과 인간’ 수업에서 담았던 마음을 일상에서 펼쳐가고 있습니다. … 수업을 듣고 진로를 바꾼 학생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날 때쯤 제 방에 와서 “선생님, 책임지세요”라고 협박하는 학생들도 있고, 자기가 4년 동안 전공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선생님 수업을 듣고 너무 혼란스럽다”라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서야 연락이 와요. 언젠가 한 학생이 미얀마에 있다고 안부를 전했습니다. 미얀마에서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대요. 제가 “왜 그런 걸 하느냐?”라고 물으니, “다 선생님 때문이에요.”하더군요. …
[안희경]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공부’가 ‘진짜 공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들이 교실 밖에서 그동안 샇은 배움을 동원해 새로운 모색을 하면서 자기 삶까지 변화시키는 그 맛을 보았구나’ 싶어요. 삶에 기회를 주는 수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