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서보다 MVP를 먼저 만드는게 나아요!
기획서 쓰고 수정하는 시간에,
MVP 먼저 만들고 고객 관점에서 피드백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든 일이 성과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일부는, ‘일을 위한 일’이죠. 특히나 한국에서는 ‘보여주기 위한 일’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표자료나 서류를 위해 이렇게 시간을 많이 쓰는 나라가 있을까요. 일은 실제로 어떤 성과나 학습으로 이어져야 가장 큰 의미가 있는데,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일,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일’, ‘성과로 보여주기 위한 일’이 상당히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저는 문서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퍼블리에 낸 첫 콘텐츠도 콘텐츠 기획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하면 체계적으로 리서치 및 아이데이션 과정을 정리하고 기록해서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정리한 글이었죠. 시장조사나 연관 프로덕트를 정리해 문서로 남겨놓고 핵심 포인트를 도출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팀 내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지금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홀로 다수의 협업자들과 일하다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코칭 프로그램, 콘텐츠, 템플릿, 커뮤니티 기획, 클래스 기획, 강의 기획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안해 실행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요, ‘기획과 승인’ 과정을 스킵할수록 일이 잘 된다는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을 위한 일’인 기획서와, ‘순서를 파괴해 미리 일을 해버리는’ 상세페이지나 실제 콘텐츠 초안 작성을 구분하는 것인데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플랫폼에서 커뮤니티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 플랫폼이 제시하는 기획서 양식에 맞춰서 아직 운영해보지 않았고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해서 쓰게 됩니다. 이 과정은 서로 머리가 아프고, 기획, 피드백, 수정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쓰게 되죠. ‘기획서’를 스킵하고 아예 커뮤니티의 상세페이지와 관련 콘텐츠를 먼저 만들어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협업자가 볼 기획서는 쓰지 않습니다. 고객이 볼 상세페이지와 콘텐츠를 만들면서 구체화시켜버립니다. 센스있고 이런 방식에 맞춰줄만한 협업사나 실무자가 많지는 않지만, 상상해서 만든 중간단계인 기획서가 아니라 실제로 고객이 볼 내용이기 때문에 쓰기도 편하고 피드백하기도 편합니다.
협업사 내의 문서양식을 활용하면 보통 일이 느려지고, 심리적 저항이 매우 높아집니다. 보통 요구사항과 기준이 빼곡하게 정리된 엑셀, 한글, 워드 문서를 활용하게 되는데, 경험상 자유도가 낮은 문서양식은 일의 속도를 늦추고 몰입을 어렵게 합니다. 기억하고 맞춰야 할 정보가 너무 많은 것이죠. 실제로 고객이 보게 될 최종 양식을 최소화한 형태로 함께 보면서 피드백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보고 있습니다. 상세페이지 각이 나오면 크리에이터도 플랫폼도 프로젝트의 핵심 내용을 이해하고 양질의 피드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외부 협업자가 익숙하지 않은 내부 양식의 지나치게 디테일한 내용을 해독하고, 또 그걸 반복해서 설명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죠.
사실 많은 경우에 디테일한 양식을 외부 협업자에게 내미는 이유는, 내부 프로세스에 맞춰서 내부 인원들이 일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디테일을 모르는 외부자에게는 갑자기 투마치 정보를 받게 되고 양식을 보며 머리가 아파오죠.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것인가라는 핵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이거 조금 고치고 저거 조금 고치다가 수정 과정이 끝나버릴 수도 있겠죠.
아마존에서 괜히 순서를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구체화되지 않은 아이디어로 얘기를 나누기보다는, 그냥 고객이 실제로 볼 무언가를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 과정에 다다르기 위해 피드백은 문서양식이나 기준 같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 초집중하면 더 좋을 것 같고요.
얼마전에는 ‘가져와’ 문화와 ‘함께해’ 문화가 다르다고 썼습니다. 많은 경우에 협업은 ‘가져와’가 되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문서 양식 드릴테니 채워서 보내주세요. 이런 저런 기준과 디테일이 있으니 맞춰서 보내주세요. 가져오세요, 가져오세요, 가져오세요. ‘가져와’의 프로세스는 조금 다른 기획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창조성과 협업자간의 시너지가 발현될 공간이 없거든요. 사실 이미 ‘갑’도 ‘답’도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틀리지 않으려고’ 에너지를 아끼게 됩니다.
‘함께해’ 문화는 조금 다릅니다. 협업자마다 리듬과 에너지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고 프로세스를 간소화하되 핵심 가치에 집중하며 개선해나갈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나눕니다. 신뢰와 심리적 안전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에 집중해야 하는 구간이 오더라도 기계적이거나 형식적으로 협업하는 것이 아니라 매끄럽게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일을 위한 일을 좋아하지 않게 됐습니다. 결국 성과나 학습으로 이어지는 일은, 순서를 파괴하고 일단 초안을 먼저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했던 것들이었거든요. 곧바로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빠른 학습을 하게 됩니다. 기획서 쌓아두고 묵혀두다가 수정을 반복하는 그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을 스킵하고 일단 만들어서 테스트하며 피드백을 받아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물론 지금은 혼자라서 이렇게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린스타트업’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MVP부터 만들고 고객 관점에서 피드백합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