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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벗 Nov 01. 2023

에고를 위한 운동, 성장을 위한 운동

운동은 꼭 나를 혹사하고 근육을 늘리는 것이어야 할까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와 중학생 시절의 구기 종목은 나에게 흥미거리가 되지 못했다. 만들기를 좋아해서 초등학생 시절 자기소개란에는 항상 ‘만들기’를 넣곤 했으니 몸을 쓴다는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어떤 결과를 위해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고 하는 기획에 크게 공감해보지 못한 것 같다. 아, 달리기는 그래도 꽤 빠른 편이었고 혼자 하는 운동이어서 그런지 좋아한 적도 있는 것 같다. 다만 운동이란 이미 정해진 규칙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경험, 그리고 기록을 내기 위해 한다는 목적은 나와 운동의 관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나도 운동을 딱히 좋아한 적은 없는데, 운동도 나를 좋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느새인가 운동은 생존이라는 단어와 함께 짝을 맞추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앉아있던 시간은 더욱 늘어났고, 때로는 스트레스가 솟구쳐 감당하기 쉽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오래 앉아있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얘기, 수명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하면 연구실에 스탠딩 데스크를 들일까 고민한 적도 있다. 무릎의자라고해서 등받이가 없는 흔들의자가 있었는데, 하나 사서 꽤 오랫동안 사용했었다. 덕분에 어떤 혜택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랜 시간 앉아있기에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했고, 헬스장을 끊고 의지를 불태우다 금방 사그러드는 패턴은 반복됐다. 내가 기억하는 한 3개월이 넘는 운동 습관을 만들어본 적은 없다. 몸을 왠지 혹사해야 할 것 같고, 근육을 조금이라도 더 붙이는 것이 목적인 것 같고, 몸은 통제하고 밀어붙어야 한다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몸짱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유행이었고, 공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운동은 항상 근육을 늘리고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운동과 친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대학원 시절에 만들었던 평생 친구는 명상이었다. 명상은 정신을 혹사하라거나 한계까지 밀어붙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호흡과 마음을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역설적이게도 아직 몸이 준비되지 않았고 피로가 쌓여있어서 명상을 하면서 꽤나 많이 졸았지만 그래도 명상은 나의 평생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번 생에서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먼저 몸을 준비하라!’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가 아닌가. 체력이 달려서야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사람이 게을러지고 우울해하거나 왠지 모르게 분노가 올라오는 등 정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때가 있고, 특별히 정신의 통제가 어려운 사람도 있는데 생각해보면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탄탄한 체력이 받쳐준다면 삶의 다른 영역에 접근하기에 훨씬 쉬워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달리기, 헬스, 크로스핏, 등산 등 내가 짝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운동 중 나를 사랑해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새부터인가 어깨와 목이 경직되고 아프기 시작했고, 격렬하게 몸이 움직이면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먼저 올라왔다. 힘들기만 한 이런 것을 누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몇년 전부터는 다시 성장의 의지를 불태웠다. 독서, 글쓰기, 네트워킹 같은 좋은 습관을 하나 둘씩 생활에 들여 나를 개선해나가는 일이 참 재미있었다. 성장에도 호르몬이 있다면, 그것에 빠져 몇년을 보낸 것 같다. 역시 여기서도 문제는 운동이었다.


하루 5분씩 홈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팔굽혀펴기도 해보고, 유튜브 영상을 따라하기도 했다. 한때는 거의 매일 30분 정도는 유튜브 영상을 따라하며 운동했으니 꽤 성공했던 셈이다. 결과로 얻은 지방이 조금 줄어들고 약간 더 탄탄해진 근육은 꽤나 마음에 들었지만, 운동 자체가 즐겁지는 않았다. 여전히 외부의 명령에 맞춰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헐떡여야 했다. 끝나고나면 힘이 생기기보다는 쭉 빠졌다.


경직된 몸을 개선하기 위해 스트레칭도 해보고 요가 영상을 따라해보기 시작했다. 명상은 꽤 오랫동안 하고 있었고, 요가가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감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대학원 시절엔 요가원에 3개월 회원권 등록을 하고 몇일만 나간 적도 있었다. 다시 만난 요가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혹사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근육을 만들지 않으면, 지방을 줄이지 않으면 내 몸은 아름답지 않다는 암시가 깔려있지도 않았다.


경직된 몸이라 동작을 따라하는데는 힘들었지만, 몸의 느낌과 호흡을 지켜보며 따라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는 선생님의 말이 와닿았다. 아마 나보다 몸이 더 안도하지 않았을까. 한계점을 넘어 밀어붙이지 않아도, 어색할만큼 헐떡이며 멍한 정신으로 땀을 뚝뚝 흘려대지 않아도 운동할 수 있다는 말에. 재미가 들리기 시작했다. 홈트레이닝, 요가, 간헐적 단식과 건강한 식단 덕에 체중은 10kg가 넘게 빠졌다. 이전에 비해 어깨와 목의 통증도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정신이 조금씩 더 명료해진 것 같다. 아드레날린의 강한 러쉬가 아닌,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라고 할까. 드디어, 나와 맞는 운동,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다.


요가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무제한으로 끊고는 아침 저녁으로 나가기도 하고, 두시간 연속으로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처음에는 활동적인 아쉬탕가 요가에 흥미가 끌렸다. 선생님은 이름을 불러주며 자세를 계속해서 교정해주셨고, 젊은 남자가 적은 수업에서 남자가 더 잘하는 자세에선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탕가를 하고 나면 온몸에 근육통이 있었고, 경직된 상태로 일상을 보내는 일이 늘며 고민하게 됐다.


빈야사, 하타, 차크라, 인요가까지 다양한 수업을 들어보며 내가 원하는 요가는 하타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운동보다는 차라리 스트레칭과 명상이 결합된 세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요가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은 하타요가가 가장 전통적인 요가에 가깝다는 사실을 배웠지만, 나도 나름의 탐색과 성장의 여정을 거쳐야했던 것이 아닐까.


하타요가 전문 요가원에 다니고 있다. 세션이 80분인데 보통 90분 정도까지 한다. 코브라 자세(부장가사나)를 5분씩 하는 스타일에 원데이클래스에선 ‘무리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근육통이 적었고, 나의 일상을 경직되기보다는 더 여유롭고 매끄럽게 만들어줬다. 명상이 깊어지는데도 도움이 됐다. 사실 요가의 목적은 삼매경, 명상 그 자체가 아닌가.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다. 에고를 강화하기 위해 몸을 혹사하고 통제하고 훈련시켜 근육을 붙이는 방식은 나와 맞지 않았다. 사진 속의 나를 사랑하지만, 일상에선 근육통으로 하루를 보내는 스타일은 무언가 어색했다. 요가를 만나고 난 외면의 내가 아닌 내 몸 속의 경험이 개선되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조금 더 풀리고, 명상적인 순간이 늘어가며, 분노나 우울이 줄고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늘었다. 저항을 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쓰는 방식이 아니라, 저항 자체가 줄어들어서 몸과 마음이 말랑말랑하되 기립근은 서있는 상태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운동이란 살을 빼고 근육을 늘려 사진 속의 당신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운동이라면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만약 운동이 에고에 살을 찌우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놓아주고, 몸의 외면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경험을 개선하며, 태어난 성별과 관계없이 내 목적에 따라 고를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을 찾은 것 같다.


머나먼 성장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몸을 준비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몸이 과연 단백질로만 만들어진 것이어야만 할까. 혹시 나는 강함에 비해 유연함과 매끄러움을 지나치게 간과해왔던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분과 티타임을 가졌다. 그는 나에게 성장을 위한 조언을 물었는데,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억지로 몸을 만들기 위해 혹사하는 것 말고, 내 몸 안의 나를 더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며, 매일 1시간씩 해도 즐겁고 감사한 운동을 찾으시면 좋겠다고.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은 분명 나와는 다를 수 있다. 헬스 트레이닝에 재미를 붙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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