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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chemion Dec 15. 2024

고슴도치를 껴안을 용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죽음에 관한 소고 1

 




  죽음에 관한 소고, 지금 시작합니다. 첫 주제는 고슴도치에 관한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슴도치의 가시는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시는 적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동료 들간의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고슴도치에게 가시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숙명과도 같습니다. 스스로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가시를 간직한 채로 평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고슴도치의 가시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낯선 타인을 향한 경계심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타인을 향해 최대한 가시를 날카롭게 세움으로써 타인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합니다. 타인을 향한 무의식적 방어기제는 우리들은 언제나 안전한 지대에 머무르게 하고, 삶은 늘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언제나 가던 길, 언제나 하던 동일한 선택, 언제나 먹던 음식, 언제나 하던 패턴의 생각, 언제나 느끼는 감정 등등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가시 안에서 일어납니다.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가시는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삶을 향한 집착과 애욕으로 물들어있습니다. 스스로가 알고 있던 자기 자신의 이미지와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원치 않는 마음은 타인과 나라는 존재를 구별해서 보고, 특별하게 여기는 개성을 먹고 살아가지요. 나는 저들과 달라, 나는 저들보다 더 나은 존재야, 이러한 믿음들이 스스로를 지켜준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코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를 놓아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들이 바로 현재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기반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들이 오히려 삶이라는 퍼즐을 완성시키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 믿음들은 삶의 완성을 위해 버려야 할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삶이 단조롭고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나요? 삶은 언제나 활기와 생동감으로 넘쳐나고 있는데, 삶의 역동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는 자부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 삶이 언젠가 끝이 난다는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삶이 갖고 있는 역동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생명이 죽어버린 삶이 내가 바라던 삶이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삶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치부하면서 말입니다. 


  죽음과 함께 스스로가 지닌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없어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저 받아들여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꽃이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의식적인 죽음의 순간을 맞이해 보는 겁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맘껏 살아 숨 쉬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없습니다. 오직 삶을 향한 투쟁과 갈등 속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벌벌 떨면서 사는 것은 결코 인간다운 삶이 아닙니다. 


 죽음을 온전히 수용하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삶이 바로 진정으로 영적인 삶입니다.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영적 측면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심오한 영향력의 근간입니다. 나의 삶이 소중하고 가치가 있듯이 타인의 삶 또한 존중받을만합니다. 오직 나와 타인을 동일선상에서 올려놓고 바라보는 마음만이 평등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고슴도치를 껴안을 용기는 나라는 이미지와 정체성을 내려놓고 완전히 스스로에 대해 죽을 수 있는 지혜로부터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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