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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chemion Dec 19. 2024

오늘도 스스로를 해치셨나요?

죽음에 관한 소고 8

 




 죽음에 관한 소고 여덟 번째입니다. 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광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류는 성 에너지를 올바르게 제어하고 활용함으로써 성 에너지로부터 해방을 누릴 수 있을까요? 머지않아, 그러한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해 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입니다. 삶은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니까요.



 

 우주를 담고 있는 한 생명을 탄생시킬 정도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성 에너지는 매우 소중하고 귀중한 자원이다. 현 자본주의 산업은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욕의 무분별한 낭비에 대해서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다. 남녀 간의 자유로운 성행위와 더불어 자위나 수음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인체를 단지 물질적 육체에 한정된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는 이러한 논리와 명제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체를 조금 더 미묘하고 섬세한 차원에서 바라볼 때, 성 에너지의 축적은 우리들의 삶 전반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의 중대함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명력이 과도한 성행위 혹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를 통해 지속적으로 낭비되는 한, 우리들은 성 에너지가 담고 있는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한 결과, 현재 우리들은 쾌락이 가져다주는 감각의 역치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더 많은 쾌락이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음을 여실히 실감하고 있다. 일정 부분 생존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 있어서 쾌락은 수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삶의 기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쾌락이 육체적 생존 그 이상을 넘어서 받아들여질 때에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심각한 피해로 이어진다. 육체적 형상의 한계와 제약 안에 갇혀 있는 형국에서는 삶의 주도권이 외부의 대상에 의해 전적으로 의존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 에너지를 무분별하게 낭비하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쾌락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신념 아래에서 우리들의 삶은 조금씩 물질적 체험에 중독되어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있다. 



  

 성욕은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영혼의 영원함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인간의 존재는 대에서 대를 이어서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영원불멸함을 확인받고자 한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염원과 소망은 성욕이라는 형태로 남녀 간의 끌림을 정당화한다. 남녀 간의 끌림은 자연의 이치가 주관하는 현상임에 분명하지만, 성이 담고 있는 잠재력이 오로지 남녀의 성행위로만 축소되는 현상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제한됨에 따라 우리들은 반복되는 물질적 체험 속에서 생명력이 점점 소진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누출만이 일어나는 안밖의 조건 안에서 현대인들의 낯빛이 어둡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킬 정도의 잠재력을 지닌 성욕은 만물을 신성의 현현이라는 지상 최고의 지위로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정화와 치유의 작업이 이루어진 몸과 마음의 간절한 염원이 서로 맞물려 밑에 머물러 있는 뇌척수액을 머리의 정수리까지 끌러 올릴 때, 우리들은 더 이상 성적 충동에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다. 올바르게 해소되고 발산된 성 에너지는 더 이상 성적 억압을 만들어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 에너지가 바로 신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깨닫게 한다. 신의 섭리와 일치하는 생각은 무한한 창조력을 우주로부터 끌어당기는 견인차다. 


 "만물에게 아낌없이 무한한 자유와 사랑을 선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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