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소고 9
죽음에 관한 소고가 어느덧 아홉 번째에 이르렀습니다.
생각이 가진 위대한 힘을 믿고서 끝까지 글들을 낭독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죽음을 곁에 두고, 항시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의 매 순간마다 우리들은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의사 결정을 내립니다. 죽음에 대한 사색과 성찰은 그대의 삶을 더 풍요롭게 물들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삶을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현재 진행형이므로 우리들은 삶의 어떠한 것을 바라보더라도 통합적이고 서로 간의 맥락적 연관성을 살필 수 있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함이 마땅하다. 의례 당연하고 상식이었던 것이 서서히 물질적 체험이 만연해짐에 따라 물질에 비해서 정신의 기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무엇이 더 우선적이고, 무엇이 더 앞서 있는지에 대한 위계질서가 제대로 안 잡혀 있는 세계 안에서 생명은 매 순간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혼란과 무질서는 늘 생명의 항상성을 깨뜨리는 원인으로서 새로운 진화와 성숙의 발판으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그로부터 마땅한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더 많은 고통을 통해 배움을 학습도록 한다. 고통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고, 고통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사색해 볼 때 우리들은 고통이 바로 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임을 깨닫는다.
남성성의 쇠퇴는 정신이 갖고 있는 힘이 삶 속에서 물질보다 우선적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이로부터 우리들은 인간의 존재가 지구상에 그 어떠한 생물보다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우를 범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물질적 재산을 축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만연하게 만드는 원흉일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해야 하는 일을 망각한 채로 오로지 먹고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도록 만들어 삶 전반을 황폐하게 만든다. 삶에서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아는 일 외에 외부의 목적을 달성하고 추구하는 인과적 오류에 빠지게 만들고, 삶으로부터 개별적 인격에 도움이 되는 이득과 실리를 추구하는 헛된 망상 속에서 삶 전체를 낭비하게 만든다. 효율성과 합리성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들은 생명이 갖고 있는 본연의 활기와 생동감을 억압한다. 삶이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꿈에 지나지 않다는 진실을 외면한 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지 못한다. 삶은 아무런 쓸모와 효용이 없기 때문에 삶은 유희의 수단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스스로를 올바르게 알고 있다면, 육체라는 탈 것을 지니고서 노니는 영혼의 놀이터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위와 같은 직관적 앎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를 육체적 형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막상 스스로는 그 어떠한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에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여야 의미를 만들고 삶의 목적을 설계할 수 있는 당연한 이치가 물질적 형상을 스스로로 착각함에 따라 망각되고 잊힌다. 물질적 형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면, 세상은 처음부터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스스로가 오해함으로써 빛을 눈앞에 두고서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낱낱이 밝혀진다.
도시의 높다란 건물들은 육체적 형상에 갇힌 영혼이 하늘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스스로가 하늘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에 닿고자 하는 욕망을 높은 건물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도시의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그 건물들이 시야의 앞에서 광활하고 드넓은 하늘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시야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경관은 의식의 확장을 가로막는다. 이는 인간의 존재를 육체적 형상으로 제한하는 생각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나 지평선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대양 앞에서는 시야의 범위가 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므로 육체적 형상에 정신이 사로잡히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육체적 형상에 대해 스스로 의식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 마음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와 전 우주를 점하고 있는 보편적 의식으로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