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이 되어버린 고난의 드라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요한복음 15장 9절
고난 주일이 다가오면 우리의 마음은 조금 분주해집니다.
금식의 허기를 훈장처럼 견디고,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교회로 향합니다. 그 열심은 분명 귀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경건이 때로는 ‘젖은 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더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마음, 조금 더 애써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마음 한편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금식으로 예민해진 마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해 날을 세우기도 하고, “나는 이만큼 하고 있다”는 조용한 자부심이 어느새 다른 사람을 재는 차가운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정말 예수의 길을 뒤따르는 중일까요, 혹시 예수라는 무대 위에 ‘나’라는 주인공을 올려두고, 스스로의 경건에 도취해 주인공으로 세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한복음 13장은 조금 낯설게 시작됩니다.
보통 예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사랑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마태와 마가가 이웃과 원수를 향해 사랑의 지평을 넓히라고 말할 때,
요한은 오히려 사랑의 ‘뿌리’를 파고듭니다.
우리는 사랑을 '더 많이 하는 것', 즉 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넓게, 더 멀리, 더 뜨겁게 내어주는 노동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작 내 영혼이 텅 비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흘려보낼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사랑을 잘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이 한마디를 먼저 던집니다.
“너는 이미 내 울타리 안에 있다. 너는 이미 사랑받는 사람이다.”
‘자기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선택된 존재가 아니라, 아무것도 증명하기 전에 이미 그분의 소유로 점찍힌 존재라는 거룩한 안도감입니다.
우리는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는 세계' 속에 살아갑니다.
잘하면 가치가 있고, 실패하면 존재 의미마저 사라지는 상품화된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두 방향으로 무너집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의 자기 경멸과,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나를 더 크게 포장하려는 자기 집착입니다.
십자가는 이 잔인한 성과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해 “더 잘해라, 더 버텨라”라고 호통치지 않습니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충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이미 충분하다.”
고난은 우리를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지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눈물겨운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이 말씀은 우리 삶의 문법을 ‘수동태’로 바꿉니다.
사랑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온기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면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이 온기가 스며들 듯, 그분의 사랑은 그렇게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증명하려 들지 않아도, 조용히 머물기만 해도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각 잡고 앉아 평가받아야 하는 '어려운 시댁' 같지만,
주님의 사랑은 언제든 신발을 벗고 발을 뻗어 누울 수 있는 '친정'과 같습니다.
그 안전한 품 안에서 비로소 '존재론적 안정감'을 누릴 때, 우리는 나를 덜 미워하게 되고 타인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 더 부드러워집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설득하려 합니다.
더 좋은 말로, 더 단단한 논리로 예수를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움직였던 순간은 언제나 다릅니다.
누군가 내가 힘들때 댓가없이 내 곁에 있어 주었을 때, 내가 아무것도 내어놓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인데도 조용히 손을 잡아주었을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지?”
그 질문은 부담이 아니라,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리는 따뜻한 충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 한 문장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랑을 통과시키는 통로일 뿐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해도 열매가 스스로 맺히듯이,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사랑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통해 흘러갑니다.
이번 고난 주일에는 조금 덜 하셔도 괜찮습니다.
조금 덜 증명하셔도, 조금 덜 애쓰셔도 괜찮습니다.
대신,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나는 이미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마음 깊이 내려앉을 때, 우리는 어느새 누군가를 향해 조금 더 따뜻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 조용히 묻기 시작할 때,
“저들은 무엇을 가졌기에, 고난 속에서도 저토록 평안한가?”
그 경이로운 질문이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가,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에 진정으로 동참하며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고난 주일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