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삶의 결핍과 인생의 불완전함
산책을 하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현관 앞 거울이다. 산책을 나서기 전, 나는 거울 앞에서 습관적으로 머리를 빗는다.
사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건 자기 위로에 가깝다.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감춰보려는, 어떻게 보면 변명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거울 앞에 서서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나를 살펴본다.
"늙는구나. 여기도 쭈글쭈글, 저기도 짜글짜글."
제법 많이 빠져버린 머리카락과, 두툼한 뱃살과, 웬만한 아가씨들의 허리만 한 내 허벅지.
사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몸치에다가 음치도 겸비했으며, 그리 똑똑한 것 같지도 않다.
거울 속 나를 보고있자니 진한 패배자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한때 꿈꾸던 완벽이라는 단어는 나에게서 아주 먼 세상 얘기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완벽을 꿈꾼다.
누군가는 완벽한 외모를, 누군가는 완벽한 커리어를,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완벽한 인간관계를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기대에 그리 호락호락하게 부응하지 않는다.
작은 실수 하나에, 계획에서 어긋난 분자 수준의 변수 하나에도 좌절하는 게 우리 인생이다.
그래서 완벽은 마치 저 멀리 있는 별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손을 뻗는 순간, 멀리 달아나는 것 같다.
밤하늘에 달이 휘영청 밝다.
한국에서는 추석이지만, 베트남에서는 그저 달이 조금 더 크고 밝은 평범한 밤이다.
유난히 커다란 달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소원을 빌어보고 싶다.
"저 달빛처럼 내 인생도 좀 더 근사해졌으면."
물론, 나는 SF 영화처럼 달빛을 받고 특별한 능력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하진 않는다.
이 나이에는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분할 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뭔가 좀 달라지고 싶다.
완벽한 직장인,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산책을 하던 중, 함께 걷던 잔디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달밤에 웬 산책이냐, 잘 시간엔 좀 자자!'라는 표정이다.
나도 잔디와 눈싸움을 하다가, 문득 달빛이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걸 깨닫는다.
우리 둘의 짧은 다리도 길게 늘어져 그림자가 참 근사해 보인다.
사실 나는 완벽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이가 깨진 접시나 조각이 한두 개 빠진 직소퍼즐처럼 뭔가 결함이 많은 사람이다.
걷다가 문득 완벽이란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완벽을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완벽은 상대적이다.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게 남에게는 불완전하게 보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니 완벽이란 건 결국 내 마음속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태라면, 그게 나만의 완벽일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떠오른다. 이 양반은 인생을 끝없는 결핍과 고통의 연속이라 했는데,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은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 느끼며, 그 결핍을 채우려고 애쓴다.
문제는 갈증을 해결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오히려 더 큰 갈증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고통과 불만족의 끝없는 반복”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것으로 느껴진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완벽주의가 인간의 열등감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깎아내리고,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 완벽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완벽주의는 우리를 끊임없이 불만족 상태에 빠뜨린다.
완벽은 마치 마약과 같다. 처음에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자신을 혹사시키고 작은 실수에도 과민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완벽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점점 더 강도가 강해지고 멈출 수 없게 된다.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좌절감을 안겨주고, 끊임없는 자기비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앤 라모트는 완벽주의를 "억압자의 목소리"라고 했다. 완벽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더 큰 부담을 짊어지고, 그 속에서 자유를 잃어간다. 왜냐하면, 완벽은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완벽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달리게 만들지만,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태도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완벽의 기준 또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완벽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는 순간, 우리는 그 기준에 휘둘리게 되지만, 내가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운다면, 완벽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완벽함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은 마치 내 안의 허들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너무 높으면 넘기 어렵고, 너무 낮으면 성취감이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적당한 완벽을 찾는 것이다.
나만의 완벽함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유연함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작은 실수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완벽을 추구하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은 흠집들도 우리의 삶을 완성하는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외적인 성취를 완벽의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성공이든 외모든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은 실패로 바뀔 수 있고, 오늘의 인연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완벽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니 불완전함 속에서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방향일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최고'가 돼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힘을 좀 빼는 것도 괜찮다.
조금은 모순적인 문장이지만 적당한 완벽이 있다면, 그게 진짜 완벽이지 않을까?
변화가 눈에 보일리는 없지만 분명 완벽하게 동그래 보이는 저 추석 보름달도 조금씩 기울고 있다.
나도 달처럼 조금씩 기울어가겠지만, 오늘 이 순간 나는 불완전한 내 모습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오늘 완벽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비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오늘 나 자신을 조금 더 용서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느껴졌던 초라함도, 달빛 아래에서 마주한 나의 그림자도, 모두 완벽하지 않은 나를 향한 작고 따뜻한 시선이었다.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완벽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린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결론이 더 마음에 든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괜찮다.
집으로 돌아오며 한번 더 달을 쳐다본다.
그리고 오늘 밤 달을 보며 내리는 결론은 이것이다.
완벽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용서와 인정, 그 속에서 내가 충분히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나의 적당한 완벽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내 속도로 나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