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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Sep 23. 2024

#12. 행복이 유전자의 빅픽처?

서인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

진정한 행복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아침 6시.

산책길의 아침햇살은 부드럽다. 

빛줄기 하나하나마다 갓 구운듯한 아침향기가 담겨있는 것 같다. 

아침향기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베이커리의 은은한 빵 냄새 같다.

'행복이란 몸과 마음에 걱정이나 불편이 없는 상태'라고 누군가 정의했다.

추상적인 모든 단어의 정의가 그렇듯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맞는 말이지만 뭔가 2% 부족하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나는 몸과 마음에 걱정이나 불편함이 없는 상태로 산책을 나왔다.

그렇다고 행복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햇살과 바람이 나를 '행복하다.'라고 느끼게 하고 있다.

이거, 혹시 엔돌핀이나 도파민이 과도하게 솟구쳐 나와서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사랑이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감정이며, 이는 진화와 생존, 번식을 위한 본능적 행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도구일 뿐이라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행복 역시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과 신경 전달물질의 작용으로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어 긍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며, 이러한 반응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왠지 모르겠지만, 행복은 신경과학적 과정의 결과이며, 인간의 생존 본능과 유전적 적응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이해하는 이런 관점들이 매우 불편하다. 

물론 나와 관점이 다르다고 무조건 틀렸다고 우기고 싶지는 않다.

사실 때로는 그 이론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경우도 있어 소름이 돋기도 한다.


행복이란 뭘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행복에 대해 궁금증이 손을 흔든다.

좋은 직장, 따뜻한 가정, 그리고 아침마다 즐기는 한 잔의 커피?

아니면 로또 1등에 당첨되거나, SNS에서 '좋아요'가 폭발할 때 느껴지는 엔돌핀 광란의 축제?

행복, 도대체 넌 누구냐?

그런데, 잘 알 수는 없지만 이게 생존을 위해 배후에서 숨죽여 지시하고 있는 유전자의 빅픽쳐라면?


최근에 다시 읽은 서인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보면서 이전과는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행복이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라는 책의 일부 내용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인다.

내가 말했듯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방금 바람 한 줄기에 느끼는 가슴 뿌듯한 기분 좋은 이 행복감, 그게 다 '유전자의 장난이다.'라는 말인가?

그 장난 속에 숨겨진 엄청난 음모는 생존을 위한 전략일 뿐이고?

우리가 그저 유전자의 거대한 게임 속에서 조정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서인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이북으로 들으며 산책길을 걷고 있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과 과학적 논지에 기가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편하다. 

인간의 행복을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접근하려는 방식과 참신한 내용에 대해 무릎을 탁 치며 '맞네. 맞네.'를 외치면서도 뭔가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반론이 머리를 두드린다.

그래서 오늘 산책은 서인국 교수님의 행복론에 반기를 들어볼 작정으로 한걸음 한걸음 꾹꾹 눌러가며 걷는다.


행복은 그저 기분 좋은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생존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더 나아가 번식할 수 있도록 돕는 심리적 보상 체계라고 한다. 그럴듯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운동을 하고 나서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 순간, 사실 우리 몸은 "이봐, 이렇게 몸을 움직여서 건강해지면 더 오래 살 수 있어!"라며 신호를 보낸다는 말이다.

물론 그 목소리가 들릴 리도 없고 들린다 해도 그건 머릿속에서 나의 생각의 일부로 전달되겠지만 말이다.

음식을 먹고 나서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잘했군. 에너지를 채웠으니 이제 며칠은 더 살아갈 영양을 보충한 거야!" 하고 몸이 우리에게 보상으로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준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이처럼 서 교수님이 말하는 행복의 순간들은 모두 우리의 생존을 위해 설계된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고개를 든다.

자! 잠시 상상해 보자. '피자, 햄버거, 초콜릿, 감자튀김!'

생각해도 침이 고이는 걸 보니, 이미 내 안에서 행복 회로가 작동 중인가 보다. 

이 음식들! 분명 고칼로리, 고지방, 고당분이다.

우리 몸에는 좋을 리가 전혀 없다. 

유전자가 정말로 우리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작동한다면 이런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안 돼! 생명에 위험해!"라는 신호와 함께 불쾌감을 줘야 정상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피자 한 조각 베어 물 때마다 느껴지는 그 환상적인 행복감.

유전자가 짜놓은 생존 프로그램이라면 왜 우리는 건강을 망치는 음식에 이렇게 열광하게 될까?

답은 간단하다. 

행복은 유전자가 설정한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유전자의 큰 그림을 벗어나는 순간들이 더 짜릿하고 행복하다!


다른 상상을 해보자. 달콤한 휴일에 넷플릭스 켜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정주행 해본 적 있는가?

소파에 늘어져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드라마를 몰아보는 그 달콤한 시간들.

그때 느끼는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건 생존에 완전히 반하는 행동이다.

유전자는 우리가 하루 종일 누워있으면 경고해야 맞다. 

"이봐! 움직여! 안 그러면 몸이 약해져서 빨리 죽을 거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소파에 누워서 간식까지 먹어가며 감동적인 드라마의 결론을 보고선 행복의 눈물을 흘린다. 

이런 느긋함 속의 행복이 유전자의 설계라고 긍정하긴 쉽지 않다. 

이건 그저 내가 선택한 진짜 행복일 뿐이다.


조금 더 극적인 예를 상상해 보자. 번지점프를 하는 순간을 말이다. 

스카이다이빙, 로데오, 아니면 그냥 롤러코스터라도 좋다. 

이런 위험한 활동을 할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순간 누군가는 강렬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나는 아니다.

어쨌든 이거 정말 이상하다. 유전자가 정말 우리의 생존을 위해 행복을 설계했다면, 고공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불행을 느껴야 맞다.

“이봐, 이러다 죽어!”라고 경고해야 할 텐데, 현실은 정반대다.

스릴과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그 순간이 행복의 절정이니까 말이다.

유전자야,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니? 이 위험한 순간에 졸고 있는 건 아니지?


자,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점점 열기를 뿜어내려고 하니 좀 더 속도를 내보자.

행복이 유전자의 생존 프로그램이라는 논리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유전자가 우리를 더 오래 살아남고 번식할 수 있도록 특정한 행동에 보상을 주며, 그 보상으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행복이라는 설명이다.

어쩌면 그래서 피자를 먹을 때, 운동을 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느끼는 행복이 모두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행복이 유전자의 생존 프로그램일 뿐일까?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개인적 요인들이 과연 복잡한 행복의 방정식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 있을까?


우선, 행복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 느꼈던 행복과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중세 사람들은 종교적 성취나 신앙심에서 행복을 찾았고, 심지어 금욕과 고통도 행복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들은 신을 위한 고난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개인적 성공, 자기 계발, 물질적 풍요에서 행복을 찾는다. 

예를 들어, 승진이나 자동차 구입 같은 일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중세 사람들이 금욕을 통해 구원받으려 했다면, 현대인들은 신형 스마트폰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 행복을 유전자의 프로그램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유전자가 스마트폰 소프트웨어처럼 매년 업데이트되는 건 아닐 테니, 지금의 우리의 행복은 어쩌면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초기 원시 시대 인간은 아니니까.

유전자는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채 생존과 번식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유지해 왔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는 우리의 행복을 유전자의 설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우리의 행복은 단순한 생물학적 본능을 넘어서, 사회적 관계, 문화적 가치, 개인의 성취와 같은 외부 요인에 더욱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스스로 세운 꿈을 달성할 때 깊은 행복을 느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들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가끔 배고플지 몰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면서 행복을 느낀다. 돈도 잘 안 벌리고, 신형 스마트폰도 못 사지만, 그들에게는 예술적 표현이 더 중요한 행복이다. 

그들의 유전자만 특이하게 "예술은 생존에 중요해!"라는 버전으로 설계된 걸까? 

아니면 그저 인간의 창의성과 정신적 탐구가 유전자의 큰 그림을 뛰어넘는 걸까?


사회적 관계에서도 우리는 특별한 행복을 느낀다. 예를 들어, 자원봉사를 하면서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도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다. 유전자가 단지 "생존을 위해 살아라!"라고 설계했다면, 왜 우리는 남을 도우면서도 행복을 느끼는 걸까? 단순히 나의 선의적인 행동이 나중에 내가 어려운 상항에서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나중이라는 상황이 오지 않는 목숨을 건 이타적인 행동도 있으니 말이다.

나아가, 봉사활동이 끝난 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유전자가 설계한 행복"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느끼는 보람"일 것이다. 유전자가 이런 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우다이모니아'라는 행복은 그저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삶을 성찰하고 덕을 쌓는 과정에서 오는 행복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순간, 유전자는 아마 "그냥 오래 살아라!"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더 깊은 행복을 찾는다.

결국, 유전자가 설계한 행복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속에서 더 큰 행복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유전자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끔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행복을 창조한다. 피자 한 조각이든, 예술 작품이든, 유전자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행복이 우리에겐 충분히 많다.


유전자는 정말로 생존의 전문가다. 

우리 생존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수백만 년 동안 우리를 잘 이끌어 준 덕분에, 오늘날 이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가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하여 행복을 통제하는 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유전자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하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우리는 때때로 유전자의 생존 논리를 거스르며 행복을 찾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행복은 유전자가 설계한 단순한 보상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 자기 발견 속에서 더 깊고 풍부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유전자가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인간의 행복은 그 이상의 것임에 분명하다.


결국,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유전자와 우리의 행복은 마치 함께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다고. 

유전자는 생존을 위한 기본 리듬을 만들어주지만, 그 위에 어떤 멋진 춤을 추느냐는 우리의 선택일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가 만든 기본 리듬에 맞춰 살면서도,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새로운 행복의 춤을 계속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유전자를 무시할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완전히 휘둘릴 필요도 없다.

그들과 함께 리듬을 맞추면서, 우리는 그 리듬을 넘어 더 깊고 풍부한 행복을 창조해 갈 수 있는 존재니까 말이다.


유전자의 계획이든, 생존을 위한 프로그램이든 상관없다.

인간의 행복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삶의 의미와 정신적 충족,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방식으로 행복을 찾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 떠나는 산책길 위에 서있다. 


 "진정한 행복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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