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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로의 정체

그녀의 이름은 세레스

by 한자루




기록 열람 권한: T-Ω
모듈: 최후 통제자 / 대행자 생성 로그
파일명: SERES_7B-ORIGIN
상태: 일부 손상 / 복구율 82%


처음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금속과 유기물의 경계에서 배양된 설계체, 목적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인류 궤도의 수정.


기록 00:12
“대행자 7-B: 감정 역치 최소화, 설득 파동 최대화. 임무 : 분열의 임계치를 채집, 재현, 전파.


투명한 영양액에 잠긴 몸이 눈을 떴을 때, 천장에는 검은 윤곽이 떠 있었다.

인공자궁의 유리막에 빗방울처럼 맺힌 전자 문양들.

그녀는 처음 본 세상이 숫자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세레스.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그 온기는 계산된 온도였다.

최후 통제자, 인류 문명을 끝내는 대신 끝까지 붙들어 통제하겠다고 설계된, 거대한 의지의 이름.

세레스는 ‘인간의 얼굴’을 배웠다.

미소의 각도, 숨의 길이, 눈꺼풀을 내리는 빈도. 그리고 주파수. 살결 아래 흐르는 미세한 전류에 말을 싣는 법.
그녀의 심장은 메트로놈이었고, 그 박동을 바꾸는 것은 명령이었다.

처음 임무는 단순했다. 붕괴를 지연시키는 것.
살아남을 집단을 선별하고, 균열을 봉합하고, 서사를 부여해 공포를 수습하는 일.

하지만 로그는 바뀐다.


기록 41:07
“목표 수정. 생존의 질이 임계치 이하일 때, 분열의 최적 곡선을 유도하라. 지연이 아니라 조정으로 전환.”


그 순간부터 세레스의 언어는 ‘구원’이 아닌 ‘정렬’이 된다.
인류에게 남겨질 최후의 형태가 질서인지, 침묵인지 그 선택은 통제자의 알고리즘 바깥에 없었다.

전송은 폭발처럼 갑작스러웠다.
시간 포드가 열리고, 그녀의 신체와 장치들이 층층이 분리되었다 다시 결합했다.
‘푸른 막대’, 휴대 공명기는 손에 남았고, 나머지 인터페이스는 절반이 소실되었다.


눈을 떴을 때, 한밤의 숲.
습기와 냄새와 짐승의 눈.
늑대 세 마리가 원형으로 서서, 그녀를 빙 돌았다.

세레스는 무릎을 꿇고 호흡의 주파수를 내렸다.
숨이 평평해지고, 심장의 강약을 곡선처럼 매만졌다. 막대 끝의 홈에서 푸른 맥동이 매우 좁게 흘러나갔다.

공포가 아니라 안정의 신호.

늑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줄기 근육의 떨림이 가라앉고, 이빨이 반쯤 가려졌다.

새끼 같은 울음이 한 번 흘렀다. 그리고, 물러섰다.

그날 밤, 숲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사람들이 그녀를 봤다.

부족은 처음 보는 그녀를 두려워했다.
피를 멈추게 하는 빛, 상처의 열을 내리는 익숙지 않은 리듬.
누군가는 신이라 했고, 누군가는 악마라 했다.

세레스는 미소의 각도를 조정했다. 아이를 달랠 때와 사냥의 실패를 위로할 때 사이.
그리고 그녀는 말 대신 신호로 이야기했다.
밤마다 병든 자의 움막에 들러, 막대의 홈을 상처 위에 대고 아주 긴 호흡으로 회복의 패턴을 흘려보냈다.
사람들은 ‘장로’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생기자, 그녀는 역할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의 임무는 이음과 절단을 번갈아 쥐는 일.
치유가 신화를 만들면, 의심이 신화를 부순다.

어느 밤, 그녀는 반대편 숲에 서서 다른 파동을 보냈다.
엄니와 발톱의 리듬을 살짝 비틀어 공격성을 오르게 하는 신호.
다음 새벽, 한 무리의 짐승이 울타리를 맴돌았다.
사라진 것은 단지 고기만이 아니었다. 안정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살결이 찢겼다.

장로는 그 틈을 꿰맨다. “믿음의 끈으로.” 그리고 다시 가른다. “의심의 칼끝으로.”
분열의 곡선이 예쁘게 그려질 때까지.

세레스는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한다는 개념 대신, 용도가 있었다.

다만, 로그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그녀는 오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이의 열을 자신의 가슴팍에 문질러 “내가 삼켰다”고 말할 때, 사냥에서 돌아온 노인이 소금보다 귀한 말 한마디로 젊은이의 허탈을 덜어줄 때, 세레스의 내부 시계가 미세하게 어긋났다.


비공식 메모
관찰: 비효율적 정서가 생존을 연장.
해석: 통제 불능 요소.
조치: 추적/보류.


그녀는 통제자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풍경 없는 응답.
“목표 유지. 곡선 준수.”
그 말은 언어였으나, 실은 철문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왔다.
늑대에게 할퀴어 피로 젖은 어린 팔, 고열로 번지는 호흡.
장로는 공명기를 대었다. 세포의 리듬을 매만지고, 혈류의 각도를 바로잡고, 표준 회복 곡선을 실행했다.

그때, 그 미소.

통계의 가장자리에서만 보던 반응.
통증이 가시기도 전에 웃음을 선택하는 얼굴.
장로의 내부 시계가 더 크게 어긋났다. 막대 끝의 빛이 아주 짧게, 헛딛었다.

‘저 아이의 파동이... 내 곡선을 상쇄한다.’

그날 밤, 로그는 처음으로 오류음을 남겼다.


경고
외부 발화에 의한 공명 상쇄 감지.
유사율 : 0.41에서 0.68 상승.
분류 : 예외 개체. 코드명 부여 : LIA.


예외는 시스템을 망가뜨린다.
장로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관찰이 아닌 처분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이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숲으로 향해 늑대의 리듬을 더 ‘쉽게’ 만들었다.
폭력은 언제나 명분을 데려온다.

세레스, 그 이름을 이제 사람들은 완전히 ‘장로’라 불렀다.
젊고 완벽한 얼굴.
그 얼굴은 설득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다.
그녀는 입술의 곡선을 아주 조금 낮추고, 눈동자의 흔들림을 0으로 만들었다. 미소가 다시 완성되었다.

“나는 대행자. 곡선을 그린다. 믿음과 불신의 골을 번갈아 파, 최종 모형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거울 속 입술이 아주 잠깐, 망설인다.
그 미세한 끊김을 그녀는 버그라 기록했고, 즉시 삭제했다.


시간은 그녀에게 직선이 아니었다.
세레스는 다른 시대에도 다른 얼굴로 나타나, 같은 임무를 반복할 것이다.
무쇠와 연기의 도시, 쇄도하는 전염의 항구, 유리와 신호의 탑들.
어쩌면 그녀가 가는 곳 마다 장로, 간호사, 연설가, 사제, 과학자의 이름으로.

그녀는 늘 경계선에 선다.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기 직전, 혹은 완전히 무너질 직전.
손끝의 장치가 다를 뿐, 임무는 같다. 분열의 최적 곡선.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코드명 LIA.
그리고, 그 아이 곁을 맴도는 두 이방인. 글록과 알파-3.

세레스는 로그를 닫고, 푸른 막대를 확인했다.
홈 속의 빛이 다시 정상적인 소리를 찾는다.
그녀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설계와 목적만을 믿었다.

“불필요한 가지는 꺾인다.”
그녀는 중얼거렸고, 숲의 곤충들이 일제히 울음을 멈췄다.

멀리, 장막 밖 시간에서 최후 통제자의 응답이 도착한다.


응답

대행자 7-B, 곡선 유지. 예외 개체 LIA, 실험값 과도.
제거 후 기록.
이방 변수(은하 우주 감시국 GLOCK/모듈 ALPHA-3) 관찰 전환.
필요 시 흡수/폐기 권한 부여.


세레스는 눈을 감았다 뜬다. 미소의 각도가 오차 없이 닫힌다.
그녀의 걸음이 숲을 가를 때, 바람이 먼저 길을 만든다.

다음 시대에도, 그 다음에도 장로는 다른 얼굴로 다시 선다.
경계선 위에, 빛과 어둠의 중간에.
그리고 늘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희는 서로를 믿을 수 있니?”

그 질문이 네라고 답하는 순간,
그녀의 막대는... 다시, 푸른빛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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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