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신전 아래의 배신자들

어둠에 묻힌 로마, 설계자의 눈

by 한자루




로마의 저녁 공기는 피 냄새 대신 빵 굽는 냄새와 와인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글록의 폐 속에는 여전히 콜로세움의 먼지와 피비린내가 들러붙어 있었다.

배수구 철창을 박차고 나온 세 사람과 알파-3는 좁은 골목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리비아는 아직도 떨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망토 끝이 젖어 있는 건 흙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피 때문이었다.

루키아가 살며시 그 망토를 벗겼다.

“여기선 이 옷을 입고 다니면 안 돼. 이건... 제물의 표식이야.”

낡은 리넨 조각으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넌, 그냥 로마의 아이야. 도미티아누스의 딸도 아니고, 제물도 아니고.”

알파-3가 위에서 작게 빙글 돌았다.

“정확히 말하면, ‘인류 멸망의 주요 변수’지만요. 그냥 아이로 하는 게 마음 건강에는 좋겠죠.”

“알파-3. 지금 그런 농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글록이 낮게 말했다.

“네. 이럴 때 농담을 안 치면, 저도 두려워진단 말입니다.”


그들이 빠져나온 곳은 콜로세움 외곽의 하수 배출구였다.
바깥은 시장이 마감되는 시간대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차가 돌바닥을 긁고, 노점상이 남은 빵을 정리하고, 술 취한 남자들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도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루키아가 말했다.
“황제의 눈보다 더 무서운 건, 이 도시의 귀예요.”

알파-3가 곧바로 번역하듯 덧붙였다.

“그 말은 곧 쓸데없이 수다쟁이가 많다,라는 뜻이죠?”

루키아는 리비아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글록은 조금 뒤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붙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 글록이 물었다.

“신전이 아니라, 신전 아래로요.”
루키아의 대답은 애매했다.

“도망치려면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게 먼저 아닌가?”
글록이 다시 물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모두 군단이 지키고 있어요. 오늘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일은, 지금쯤 로마 전역의 술집에 다 퍼졌을 거예요. ‘이방인이 신을 이겼다.’라는 소문 말이죠. 그러니 황제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황제보다 더 무서운 것은 타르퀴니우스예요.”

알파-3가 끼어들었다.

“현재 도시 외곽 출구 예상 통제 확률 91%. 그리고 도시 바깥으론 황량한 농토, 시안-10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개활지. 네, 통계적으로 바깥이 더 위험합니다.”

글록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지금은 도시 안이 감옥이고, 밖은 사형장인 셈이군.”

리비아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에서 따라왔다.

“오늘 경기 봤어?”
“그 이방인, 뭐야? 신이 내린 사내야?”
“아니야, 악마야. 인간이 저렇게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루키아는 모퉁이를 돈 뒤, 한낮엔 물을 긷는 용도로 쓰이는 좁은 우물터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
그녀가 말했다.

“우물이잖아.” 글록이 눈을 찌푸렸다.

“로마에선, 물길이 곧 비밀길이에요.”

돌로 된 우물 가장자리 한쪽을 눌렀다.
가장자리 돌이 안쪽으로 살짝 기울면서, 옆의 벽돌 하나가 ‘딱’ 소리를 내며 틈을 만들었다.

좁은 틈 뒤로 계단이 내려가고 있었다.
군단도, 황제도, 설계자의 대리인도 아직은 모르는 길.

리비아가 주저했다.

“여기... 무서워요.”

루키아가 아이의 얼굴 높이까지 몸을 굽혔다.

“리비아. 기억해. 아버지는 네가 살기를 원했어. 마르쿠스도 네가 나가기를 원했고.”

그녀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넌 피 때문에 선택받은 게 아니야. 네가 기억하는 존재라서 선택받은 거야.”

알파-3가 그 말을 듣고 미세하게 떨렸다.

“기억하는 존재라고요?”

글록이 작게 되물었다.

루키아는 대답 대신 계단 아래로 먼저 내려갔다.

“이야기는 문 닫고 할게요.”


같은 시각, 콜로세움 상단의 조용한 회랑.

타르퀴니우스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고 붉게 물드는 로마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혼란이 계속됐다.
검투사들은 도망친 이방인에 대해 떠들었고, 황제는 분노와 당혹 사이에서 울부짖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고요했다.
마치 이미 모든 일을 한참 전에 본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아주 얇은, 회로 같은 빛의 선이 흐르고 있었다.

“이방인 글록. 그리고 목표 개체 리비아.”

그는 속삭이듯 말을 꺼내며,
머릿속에서만 들리는 또 다른 음성에 응답했다.

'탈주 경로 추적 완료. 도시 내부 수로 사용. 신전 하부 구조물로 이동 중'

“역시, 그녀의 목적지는 신전 지하였군.”
타르퀴니우스가 미소 지었다.

'희망 개체는 언제나, 제단으로 내려가는 길을 좋아했다. 시대와 신의 이름만 바뀔 뿐이다.'

“설계자님 그럼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관찰자 개체 글록은 아직 제거하지 마라. 그의 기록은 유용하다. 희망 개체만 제거한다. 리비아의 생존 확률, 지금 이 시점 기준 11.2%. 다음 한 시간 안에 0으로 만든다.'

타르퀴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설계자.”

그는 회랑 끝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무릎을 꿇은 세르비우스의 시체를 슬쩍 내려다봤다.

장로의 눈은 뜬 채로 굳어 있었고, 입 가장자리에 마치 기도하다 미처 끝내지 못한 단어가 걸려 있었다.

“장로님.”
타르퀴니우스가 낮게 말했다.
“당신은 신을 흉내 내고 싶어 했죠. 전, 그 신을 ‘업데이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발끝으로 살짝 세르비우스의 손을 밀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모래 위로 축 떨어졌다.

“이제, 다음 버전으로 넘어갈 시간입니다.”


우물 아래 통로는 습하고 좁았다. 문제는 어둠이 아니라, 고요였다.

지상에서는 언제나 누군가 다투고, 울고, 웃고, 신에게 소리치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아래에선 누구도 신에게 말 걸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좁은 통로 끝에, 작은 빈 공간이 있었다.
낡은 제단, 오래전 누군가 새겨 넣은 십자와 별 모양들, 그리고 창문 하나 없는 어둠.

루키아가 횃불을 켰다.
불빛이 벽에 새겨진 낡은 문양을 드러냈다.

리비아가 벽 그림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이건... 우리 신전 그림이랑 달라요.”

“그래.” 루키아가 대답했다.
“여기는, 신전에서 버려진 신들의 자리니까.”

글록이 제단 옆에 기대앉았다. 몸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알파-3가 조용히 상공에서 맴돌며 말했다.

“심장 박동수 정상 범위보다 30% 빠름.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오늘 안에는요.”

글록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살아 있겠군.”

루키아가 리비아를 제단 옆에 앉히며 말을 꺼냈다.

“리비아. 너한테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아이의 눈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신전에 있는... 제사장이요.”
리비아가 대답했다.
“아빠가 싸우러 나가기 전에, 항상 언니가 기도해 줬으니까.”

루키아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녀는 제단 위에 올려진 낡은 목각상을 어루만졌다.
전쟁의 신도, 풍요의 여신도 아닌, 눈이 감긴 어떤 아이의 조각상.

“나는 원래, 너를 지키라고 선택받은 사람이야. 제사의 사제이기 전에, ‘기억의 아이’를 지키는 수호자였다.”

알파-3가 그 단어에 반응했다.

“기억의... 아이?”

루키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르비우스가 첫 실험을 시작했을 때, 그는 우연히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어.”

그녀의 눈이 제단 위 그림을 훑었다.

“특정 아이들은, 자신이 겪지 않은 시대의 기억을 조각처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

리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나도요?”

루키아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빛은 슬펐다.

“네가 가끔 꿈에서 보지도 못한 바다를 보고,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들었다고 했었지?”

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른 시대가 남긴 기억이야. 네가... 처음은 아니야, 리비아. 기억을 품고 태어난 아이는, 시대마다 늘 한 명씩 있었어.”

알파-3가 아주 낮게, 글록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신석기 때 그 아이도... 그리고 그 아이가 남기지 못한 기억들...”

글록은 눈을 떴다.
유치원, 영상, 해양 기지, 신석기의 불꽃과 여자 장로의 눈빛이 겹쳐 떠오르고 있었다.

“설계자는 그런 아이들을 지워 왔지.”
루키아가 말했다.

“그 아이들이 살아남으면, 인류는 같은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지 못할 테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상에선 또 다른 밤이 시작되고 있었고, 지하에서는 오래된 어둠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파-3가 돌연 경고음을 냈다.

“글록. 위치 신호 감지. 위쪽에서... 수색 패턴이 잡힙니다. 황제의 병사들만이 아닙니다. 타르퀴니우스 소속의... 좀 더 조용한 전문 암살자들입니다.”

글록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루키아가 그의 어깨를 눌렀다.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나가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글록이 물었다.

루키아는 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리비아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루키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나 혼자서 리비아를 신전 깊숙이 숨기는 거였어요. 지금처럼, 아무도 모르는 지하에서. 하지만 설계자의 대리인이 움직인 이상, 이 도시는 우리 편이 아니에요.”

알파-3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생존 옵션 분석 들어갑니다. 셋이 같이 도망할 경우 추적 난이도 상승, 발각 시 전원 사망 확률 높음. 두 번째 리비아만 따로 숨긴다면 단기 생존 확률 상승, 장기적으로는 설계자 우위. 마지막은 글록과 리비아만 이동, 루키아 미끼가 되는 거죠. 인간 쪽 희생 전제해서요.

“분석 결과, 제 의견은...”

“그만.” 루키아가 알파-3의 말을 잘랐다.

“이건 숫자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제단 위에 걸어둔 작은 펜던트를 풀어 리비아의 목에 걸어주었다.

“리비아. 잘 들어. 우리가 지금 나가면... 넌 도망치는 아이가 돼. 하지만 네가 여기 남는다면... 넌... 희생양이 될 거야.”

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그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루키아는 대답 대신 글록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방인. 당신의 나라의 규칙이 어찌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도 비슷한 게 있어요.”

“무엇이지?”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남아서... 시간을 벌어야 해요.”

알파-3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키아, 당신 계획은... 혹시...?”

루키아가 걸어 나가며 말했다.

“나는 여기에 남을 거야. 리비아는 잠시 동안 내 곁에 두겠지. 대신 너희 둘은, 이 도시 밖으로 나가.”

글록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하면...”

“알아.”
루키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 때문에, 언젠가 리비아는 죽게 될 거야. 내 선택이, 그 아이를 완전히 구원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이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신이야.”

그녀는 말을 마치고, 제단 위에 있는 오래된 종을 가볍게 울렸다.

‘챙…’

어디선가 멀리서, 돌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지?” 글록이 물었다.

루키아는 속삭였다.

“신전의 다른 사제들, 그리고... 황제의 눈에서 등을 돌린 몇 사람. 이건 나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야.”

알파-3가 조용히 말했다.

“글록, 선택하셔야 합니다.”

리비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럼, 저... 저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글록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아주 짧게 대답했다.

“일단... 어디든 살아남는 곳으로.”

지상 어딘가에서 타르퀴니우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수색 범위 축소. 지하 수로, 신전 하부, 그리고 버려진 제단 주변을 우선적으로 탐색하라.'

그리고 그 뒤에서, 인간이 만든 신들의 도시 위로 미래의 설계자의 눈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비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 생존은, 이미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이 시대, 폭력의 문명이 남길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