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경기장을 벗어나다.
콜로세움의 모래가 아직도 시안-9의 피와 먼지를 토해내고 있을 때, 글록은 한 가지를 직감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싸우는 건, 임무도 아니고, 인류를 구하는 것도 아닐 뿐 아니라, 그냥 설계자의 놀음에 끌려가는 것뿐이라는 걸.
티투스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콜로세움을 울린다.
“로마는 만족하지 않았다! 신은, 더 강한 피를 원한다!”
군중이 광기에 취해 외친다.
“두 번째! 두 번째! 두 번째!”
세르비우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의 눈은 이미 광기로 젖어 있었다.
“폐하, 이방인에게 두 번째 시험을 허락해 주십시오. 시안-9은... 그저 예행연습에 불과했습니다.”
알파-3가 작게 중얼거린다.
“아, 싫은 단어 떴어요. ‘두 번째 시험’은 대부분 좋은 기억이 아니었죠.”
글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받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리비아는 단순한 미끼로만 소비될 것이다.
황제가 글록을 내려다본다.
“이방인. 로마는 너에게 영광의 기회를 또 한 번 허락한다. 두 번째 신의 전사와 싸워라. 그 대신...”
그의 시선이 리비아를 스친다.
“저 아이의 운명을, 신 앞에서 다시 결정하게 해 주겠다.”
알파-3가 바로 계산에 들어갔다. 결투를 수락할 경우 글록 생존 확률 2.3%, 리비아 생존 0%.
그러나 도주를 시도한다면 둘 다 생존 확률 7.8%였다.
역시나 희망을 가지기엔 낮은 수치였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글록. 역시 결론은 싸우는 것보다 도망가는 게 통계적으로 더 용감한 선택입니다.”
글록이 낮게 웃었다. 피가 입가에서 흘렀다.
“그래. 이제야 네가 내 스타일을 이해하는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황제를 올려다봤다.
“황제여.”
콜로세움이 조용해졌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신을 위해 싸우지 않겠습니다.”
순간, 경기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군중의 웅성거림이 찢어지듯 일어난다.
“뭐라고?” 티투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글록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저는 이미 충분히 싸웠습니다. 황제 폐하의 신은 피가 없으면 서 있지도 못하는 모래 신일 뿐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알파-3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발언 수위 상한선을 넘었습니다! 이제 진짜로 도망가야 해요!”
황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 오만한 이방인을 죽여버려라!”
그 순간, 검투사들이 출장하는 출입문 쪽에서 눈부신 빛이 글록의 시야를 비추고 있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갑옷을 입은 군단장 하나가, 뜨거운 햇살을 거울로 반사시켜 글록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마르쿠스였다.
글록은 마루쿠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마자 마루크스는 자신의 쪽으로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냈다.
글록은 황제의 명령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이미 몸을 돌렸다.
“지금이야, 글록!” 알파-3가 소리쳤다.
그는 피투성이 몸으로 모래를 차며 검투사 출입구 쪽으로 달려 나갔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호위병들이 고함을 질렀다.
“저놈을 막아라!”
창과 방패가 움직이는 소리가 뒤섞인다.
그때, 통로 입구에서 마르쿠스가 버팀목처럼 서서 외쳤다.
“이방인은 내가 데려간다! 폐하의 명으로 검투사를 후송한다!”
경비병들이 멈칫했다.
“하지만 군단장님, 황제께서...”
“내가 들은 명령은 ‘죽이기 전에 신의 뜻을 확인하라’였다. 지금은 내가 신의 뜻을 확인하러 가는 중이다.”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군단병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길을 열었다.
마르쿠스는 글록의 팔을 붙잡고 통로 안쪽으로 끌고 갔다.
“이쪽이다. 숨만 쉬고 있어라. 생각은 나중에 해.”
알파-3가 중얼거렸다.
“맞아요. 지금은 생각이 아니라, 다리 근육이 더 중요한 순간이기 합니다.”
콜로세움 지하는 또 하나의 미로였다.
야수 우리, 검투사 대기실, 피를 씻어내는 수로, 그리고 원로원도 모르는 신전 통로.
마르쿠스가 짧게 말했다.
“루키아가 기다리고 있다.”
“루키아?” 글록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리비아를 제물로 보내는 걸 보고도, 기도만 하며 조용히 있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작은 횃불 하나가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빛 아래, 루키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아빠와 싸웠던 검투사 아저씨?!” 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루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원래 계획은... 제가 리비아만 빼내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제, 둘 다 함께 나가야 해요.”
마르쿠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콜로세움 외곽으로 이어진 낡은 수도로가 있다. 몇 년 전 붕괴되어 봉쇄됐지만, 로마인들은 항상 ‘위기용 통로’를 하나쯤 남겨두지.”
루키아가 리비아의 쇠사슬을 풀며 말했다.
“저 위에서는 이미 ‘두 번째 결투’ 준비를 시작했을 거예요. 시안-10이라 불리는 다음 실험체. 세르비우스가, 마지막으로 자랑하고 싶어 하던 존재.”
알파-3가 다급하게 분석했다.
“글록, 방금 상부에서 진동 패턴 감지. 매우 크고 매우 무거운 뭔가가... 깨어나고 있어요.”
마르쿠스가 이를 악물었다.
“좋아, 그럼 우린 그게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이 경기장을 떠나야겠지.”
그들이 지하 수로로 이어지는 좁은 돌길을 지나갈 때였다.
오른쪽 벽 깊숙이 파인 아치형 공간에서 낮은, 동물 같지도 사람 같지도 않은 숨소리가 들렸다.
루키아가 숨을 멈췄다.
“여기에요. 세르비우스가 만든 두 번째 신의 방.”
가느다란 틈 사이로 거대한 어깨와,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실루엣이 보였다.
묶인 사슬이 서서히 떨리고 있었다.
알파-3가 분석을 중단했다가, 드물게 말을 잃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질량, 최소 3배. 신체 구조, 비대칭 강화. 전투용 신경 다발, 이중. 결론은 시안-9의 상위 호환. 덤으로 악몽 포함.”
마르쿠스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시안-10인가.”
세르비우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지하 신전 쪽에서 울리는 미친 기도 소리였다.
“눈을 떠라, 신의 전사여! 너의 첫 먹이가 곧 도망치려 한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어둠 속에서 노란 눈 두 개가 번쩍 켜졌다.
쇳소리가 터졌다. 사슬이 벽에서 뜯겨나가는 끔찍한 소리.
알파-3가 비명을 질렀다.
“글록! 시안-10이 리비아 쪽으로 주파수 반응을 보입니다! 그녀의 기억 패턴에 반응하고 있어요. 우릴 보는 게 아니라,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했어요!”
리비아가 루키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언니…”
“뛰어!” 마르쿠스가 소리쳤다.
네 사람은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좁은 지하 수로의 돌바닥이 발아래에서 튀었다.
뒤에서 무언가가 벽을 부수고 나오는 소리가 났다.
‘쾅! 쾅! 쾅!’
시안-10이 통로를 따라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너무 커서 설계된 길조차 버거운 몸집.
그러나 그 압도적인 힘으로 자기에게 맞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
돌조각이 튀고, 먼지가 뒤에서 폭풍처럼 쫓아왔다.
알파-3가 소리쳤다.
“속도 추정 - 우리보다 최소 2.5배 빠름! 지형 보정해도... 40초 안에 따라잡힙니다!”
“그럼 40초 안에 이 길을 끝내야겠지.”
글록의 숨이 거칠게 튀었다.
“왼쪽으로, 15미터 후 갈림길!” 알파-3가 길 안내를 시작했다.
“그대로 가면 원형 수조, 막다른 길! 그전에 꺾어야 합니다!”
루키아는 리비아의 손을 꽉 잡고 물었다.
“마르쿠스, 이 길 맞아요?”
“원래는 전차 수리용 창고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나머지는... 신에게 맡겨야겠지.”
“신은 이미 우리 반대편에 있다니까요!” 알파-3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인간들은 꼭 이 타이밍에 신을 끌어와요!”
뒤에서 또 한 번 굉음이 터졌다.
시안-10이 통로 일부를 부수며 몸을 비틀어 나온 것이다.
얼핏 그 형체가 보였다.
복수의 전사에서 떼어낸 근육들이 마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부림치며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었다.
왼쪽 팔은 짧고 굵었고, 오른팔은 길고 뒤틀려 있었다.
다리는 네 개의 구조에서 두 개로 억지로 정리된 것처럼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속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알파-3가 낮게 중얼거렸다.
“진화의 심사위원이 있다면, 저건 당연히 실격이죠.”
갈림길이 보이자, 마르쿠스가 외쳤다.
“왼쪽이다!”
네 사람은 동시에 돌아섰다.
그 순간, 뒤에서 시안-10의 팔이 휘둘러지며 통로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돌덩이 몇 개가 글록의 어깨와 등을 스쳤다.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알파-3가 다급히 물었다.
“글록. 괜찮아요? 신경 접합 상태는 아직 유지 가능합니다. 조심하세요.”
“아직은 버틸 만 해.”
리비아가 그 틈에 걸려 넘어졌다. 루키아가 급히 끌어안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본 글록의 시야에, 시안-10의 눈이 보였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괴물은 네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보고 있었다.
바로 리비아였다.
알파-3가 진단을 내렸다.
“타깃 고정. 설계자의 프로토콜은 ‘희망 개체 우선 제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글록은 이를 악물었다.
“설계자라니... 도대체 그는 누구인 거야?”
앞쪽에서 마르쿠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여기서 갈린다.”
앞엔 철창문과, 옆으로 나 있는 좁은 비밀 통로가 하나 있었다.
“앞은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만 문을 여는 순간, 이쪽에서 버텨줄 사람이 필요하지.”
루키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르쿠스, 무슨...”
그는 글록을 바라보았다.
“이방인. 넌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 나는 로마의 군단장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인간을 살리는 편에 서보고 싶군.”
글록이 입을 열려던 순간, 시안-10이 마지막 굉음을 내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루키아가 리비아를 꽉 끌어안았다. 마르쿠스는 단검 하나를 뽑았다.
말도 안 되는 무기, 말도 안 되는 상대.
“알파, 마르쿠스의 생존 확률?”
글록이 물었다.
“말 안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알 필요 없다.”
마르쿠스가 철창 레버를 잡고 글록을 바라봤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까지 10초. 그 안에 나가라.”
“마르쿠스...”
“나도 안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야. 도망이지. 하지만 어떤 도망은 싸움보다 어렵다.”
그는 마지막으로 리비아를 보았다.
“아이야. 네 아버지는 전사였다. 이건... 그가 네게 남긴 마지막 방패다.”
그리고 철창을 당겼다.
거대한 쇳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가!” 마르쿠스가 외쳤다.
글록은 루키아와 리비아를 데리고 좁은 통로로 몸을 던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순간, 시안-10의 그림자가 마르쿠스를 덮치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외침이 울렸다.
“로마는 더 이상 신의 장난감이 아니다!!”
알파-3가 조용히 말했다.
“기록했습니다.”
비밀 통로는 생각보다 짧았다.
곧 오래된 배수구 철창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노을이 지기 시작한 로마의 하늘이 보였다.
글록이 힘껏 발로 차자, 녹슨 철창이 떨어져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피와 먼지, 그리고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경기장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냄새였다.
리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루키아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래. 우린 지금... 콜로세움 밖으로 나가고 있어.”
알파-3가 살짝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글록. ‘로마 최초 콜로세움 탈주 외계 조사관’이라는 기록을 추가할 수 있겠네요.”
글록은 대답 대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뒤를 바라봤다.
콜로세움의 거대한 둥근 실루엣이 붉은 하늘 아래 검은 그림자로 떠 있었다.
그 안에서 아직도 함성과, 짐승 같은 환호와, 어떤 존재의 괴로운 포효가 뒤섞여 울려 나왔다.
루키아가 낮게 말했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에요. 황제는 우리를 놓치지 않을 거고, 타르퀴니우스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겠죠.”
알파-3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리고... 세르비우스의 심장 박동이 조금 전 멈췄습니다.”
글록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죽었나?”
“네. 시안-10의 방 쪽에서, 심장 신호가 끊겼어요. 자기가 만든 신에게 잡아먹힌 것 같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글록은 리비아를 내려다봤다.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이상하리만큼 맑았다.
“리비아.”
“네...”
“넌 기억해야 한다. 너의 아버지 도미티아누스, 너를 위해 검투장을 선택한 군단장 마르쿠스, 그리고 너를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건 루키아. 이건 너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알파-3가 덧붙였다.
“그리고, 꼭 기억해 주세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성실한 AI 하나도요.”
리비아가 알파-3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던지며 질문했다.
"이 공처럼 생긴 새가 말까지 하는데. 이건 신의 전령사인가요?"
“네. 그렇다고 해두세요. 그게 서로에게 편하겠네요. 짹짹...”
알파-3는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콜로세움의 함성이 멀어진다. 대신 로마의 거리 소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글록은 알고 있었다.
이 도망은, 진짜 탈출이 아니라 다음 비극을 향한 ‘유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리비아의 운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단지, 조금 더 길게 타고 있을 뿐이었다.
알파-3가 마지막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글록. 이 시대의 희망 개체 생존 확률, 7.8%에서 11.2%로 상승했습니다.”
글록이 대답했다.
“그래도 아직, 60%도 넘지 못했군.”
“네. 그래서...”
알파-3가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죠. 가시죠. 내비게이션을 다시 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