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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신의 실수와 인간의 반격

마지막 심판

by 한자루


세상이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움직임이 분해되어 보였다.


시안-9이 달려오는 모습도, 그의 굵은 혈관이 뛰는 순간도, 근육이 수축하는 진동까지도 모두 느리게, 그리고 명확하게 보였다.

알파-3의 목소리가 귓가로 흐른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외부의 음성이 아니라 글록의 뇌 안쪽에서 직접 울리는 진동이었다.

“좌측 흉근 반응 속도가 우측보다 0.18초 느립니다. 양쪽 다리 길이 3cm 비대칭. 착지 시 무게 중심이 1.5도 기울어요.”

글록은 피 묻은 모래를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약점은 두 개군.”

시안-9이 단숨에 거리를 줄였다.
주먹이 떨어지는 순간 뉴럴 연합된 글록의 시야는 그 공격을 여섯 조각으로 나눠 분석했다.

팔꿈치가 먼저 기울고, 어깨가 살짝 늦게 따라오고, 흉근이 느리게 긴장하며, 반대쪽 다리가 굳는다.

완벽해 보이던 괴물 전사의 움직임 속에 ‘균형의 파열음’이 보였다.


글록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전진했다.

알파-3가 놀라며 말했다.

“지금은 정면충돌을 회피해야...”

“아니. 바로 균형을 깨는 거야.” 글록은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는 시안-9의 주먹이 떨어지는 각도를 정확히 계산해 0.1초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 느린 쪽, 왼쪽 복사근 밑을 향해 주먹을 꽂았다.

‘웅...’ 금속과 살이 함께 어긋나는 둔탁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시안-9의 몸이 반박자 늦게 흔들렸다.

알파-3가 만족한 듯 말했다.

“적중! 무게 중심 12% 붕괴!”

하지만 시안-9은 곧바로 적응했다.
그 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근육이 스스로 재배열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금 당한 공격의 각도를 다시는 허용하지 않도록 자세를 바꿨다.

“글록, 역시 예측대로입니다. 한 번 본 공격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겁니다.”

글록은 피투성이 입술을 닦으며 웃었다.

“좋아. 그럼 매번 다르게 치면 되겠군.”


시안-9이 다시 달려왔다. 이번엔 지그재그로, 두개골을 박살 낼 각도로.

그러나 글록의 몸은 생각보다 빨랐다. 생각하기 전에 이미 움직여 있었다.

첫 번째 공격에선 무릎 뒤 인대, 두 번째 공격에선 오른쪽 견갑골의 틈, 세 번째 공격에선 척추 옆 장요근의 미세한 지연.

각 공격은 단 한 번씩만 사용했다.
시안-9은 맞을 때마다 곧바로 학습하고 재정렬했다.
그러나 글록과 알파-3의 연합은 학습보다 빠르게 ‘창조’했다.

시안-9은 처음으로 후퇴했다. 가슴에서 금속과 혈육이 섞인 하얀 김이 뿜어졌다.

군중이 웅성거렸다.

티투스 황제조차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르쿠스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키아는 눈이 흔들렸다.

타르퀴니우스만이 유일하게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안-9은 글록을 노려보며 숨을 들이켰다.

글록은 한 손을 들어 턱을 훔쳤다. 새하얀 먼지가 피와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제 네 균형은... 내가 알고 있다.”

알파-3가 미세하게 떨림 섞인 음성으로 응답했다.

“글록, 자만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보다 골치 아픈 녀석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뭐 제가 있긴 하지만... 하하”


시안-9의 몸이 흔들렸다.
그의 몸속에서 금속이 끓는 듯한, 뼈와 기계가 서로를 씹어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괴물의 눈에 붉은 발광점이 켜졌다.

알파-3가 낮게 속삭였다.

“글록... 지금부터는 학습이 아니라 ‘본능 모드’입니다. 지금 상태의 시안-9은 예측 불가입니다.”

곧이어 괴수의 발이 모래를 터뜨리며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접근한 것이었다.

‘쾅!’

글록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날아갔다. 등이 모래 바닥에 박히며 충격파가 일었다.

알파-3의 긴급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갈비뼈 세 개… 금 가는 소리. 폐출혈 가능성.”

글록은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흔들렸다.

그러나 시안-9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모래를 박차고 다시 달려왔다.
기계가 아니라, 사냥에 미친 야수의 움직임이었다.


첫 번째 공격 시안-9의 무게 전체를 실은 어깨 박치기. 글록의 방어가 찢어지듯 밀려났다.

두 번째 공격 괴물의 무릎이 글록의 복부를 꿰뚫듯 들어왔다. 공기가 폐에서 비어버렸다.

세 번째 공격 시안-9이 글록의 팔을 잡아 들어 올리며 모래 위로 내리꽂았다.
땅이 울렸다. 군중이 환호했다.

“피를! 피를! 피를! 보여라!!”

티투스 황제는 광기 섞인 얼굴로 일어나 외쳤다.

“이방인이여. 너의 고통을 신께 바쳐라!”

마르쿠스는 황제 옆에서 이를 악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인간이란 이렇게 처절하게 잔인한 존재란 말인가...'

루키아는 울 듯한 얼굴로 리비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시안-9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두 팔을 벌리고, 온몸의 근육과 강화된 조직이 규칙적으로 줄어들며 일종의 ‘떨림’을 만들었다.

알파-3가 비명을 질렀다.

“글록! 저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충격력입니다! 맞는 순간, 두개골이...”

더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시안-9이 뛰어올랐다. 황소가 아닌, 천둥을 타고 떨어지는 운석처럼.


그 충격은 콜로세움 바닥의 모래를 날려버리고 한순간 경기장 전체를 흔들었다.

글록의 심장이 멈춰버릴 만큼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덮쳤다.

그때 알파-3가 글록의 신경을 잡아당겼다.

고통이 사라지고, 시간이 다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 속에서 알파-3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록.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의 몸으로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방식’이라면 가능합니다.”

글록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인간이 아닌 방식?”

“네. 당신의 감각을 끊습니다.”

공포가 등골을 타고 지나갔다.

감각을 끊는다는 건 고통도, 감정도, 몸의 경고 신호도 전부 삭제한다는 뜻이다.

순수한 신경 반사와 계산만으로 싸우는 상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글록의 목에서 피가 흐르며 대답했다.

“잠깐 동안만이다. 알파.”

“약속합니다. 딱 3초.”


감각이 꺼지자 세계는 완전히 ‘선’과 ‘점’으로 분리되었다.

시안-9의 강철 같은 다리 좌측 6도 기울기. 오른 어깨 근육 반응 0.17초 지연. 척추 하중 분배 불균형.

모든 정보가 글록의 뇌에 동시에 들어온다.

그리고 글록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1초 시안-9의 약한 무릎 뒤를 지나며 손끝으로 균형을 흔든다.
2초 중심이 바뀌는 순간 복부 옆 신경선을 향해 일격.
3초 괴물의 몸이 회전했고, 그 회전을 역방향으로 잡아당겨 전신의 균형을 박살 냈다.

그러고 나서 글록의 손바닥이 시안-9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쾅!’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거대한 괴물의 몸이 공중으로 들려 올랐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졌다.

콜로세움이 적막해졌다.


시안-9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군중은 일순 정적에 빠졌다가 폭발했다.

“GLO-RI-A! GLO-RI-A!!!”

티투스 황제도 굳어 있었다.

루키아는 두 손을 입에 대며 눈물을 흘렸다. 마르쿠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글록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각이 돌아오며, 그의 몸은 다시 피투성이 고통 속으로 떨어졌다.

알파-3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확히 3초. 약속 지켰습니다.”

글록은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아주 희미하게 지었다.

“됐다. 이제... 다음은 리비아다.”

콜로세움의 흙먼지가 잦아드는 그 순간 시안-9의 몸에서 아주 미세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콜로세움 전체가 흔들렸다. 먼지가 가라앉고, 광장의 중앙에 두 존재만 남았다.

쓰러진 거인, 시안-9. 그리고 피투성이로 선 글록.

군중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듯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GLO-RI-A! GLO-RI-A! GLO-RI-A!”

마치 지진처럼 웅성거림이 경기장의 벽을 타고 울렸다.

글록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파... 이제 다 끝난 거지?”

알파-3는 떨리는 기계음으로 대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황제를 보세요.”


황제 티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승리의 감탄이 아닌 분노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황금 홀을 난간에 내리쳤다.

“이것은 신성 모독이다!”

군중의 환호가 순간 꺼졌다. 모래 위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글록을 가리켰다.

“이방인! 네가 로마의 신의 심판을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신은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리비아를 데려오라!”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리비아를 끌고 나왔다. 아이는 얼굴이 눈물로 젖었지만, 목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루키아가 그 모습을 보고 어둠 속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신전 여사제답게 조용히 서 있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황제가 외쳤다.

“그 아이는 도미티아누스의 딸이다. 패배한 전사의 피는 신의 밥이 된다!”

군중은 일부 환호했고, 일부는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렸다.

마르쿠스 군단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폐하. 도미티아누스는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의 피를 신에게 바쳤으니 그 딸만큼은...”

“침묵하라, 마르쿠스!”
황제가 소리쳤다.

“신은 너 같은 군단장 따위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


리비아가 끌려가는 순간 루키아가 신전 여사제의 복장을 정리하며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아직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고, 단지 그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떨렸다.

“리비아... 기다려. 내가 너를 지켜낼 거야.”

하지만 그녀는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였다간 바로 제물이 될 뿐이다.

그녀는 단지 지켜보고,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때, 타르퀴니우스가 황제에게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더 깊은 신의 뜻을 보셔야 합니다.”

황제의 눈이 그를 바라본다.

“이방인은 신의 시험을 아직 끝내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시험’ 일뿐입니다.”

타르퀴니우스는 리비아가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잔인할 만큼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신은 항상... 더 강한 피를 원합니다.”

말끝에, 그의 눈동자 속 회로 같은 빛이 아주 미세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챈 자는 단 한 명 어둠 속에 서 있는 루키아였다.

루키아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설계자의 그림자...”

타르퀴니우스는 그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절대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모른 척, 미소만 유지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가장 무서웠다.

드디어 세르비우스가 나섰다. 그의 장로복이 모래 위를 스치며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는 시안-9의 쓰러진 몸에 손을 얹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러더니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폐하. 시안은 첫 번째 조율된 전사일 뿐입니다.”

황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보다 더... 신의 형상을 닮은 전사가 있습니다.”


세르비우스는 고개를 들어 콜로세움 전체를 향해 선언했다.

“이방인 글록에게 두 번째 전투를 요청합니다.”

군중이 폭발했다.

“두 번째! 두 번째!”

마르쿠스가 경악했다.

“세르비우스! 또 다른 괴물을 내보내겠다는 겁니까?”

루키아는 숨을 멈췄다. 타르퀴니우스는 미소만 깊게 할 뿐이었다.


글록은 가쁜 숨을 쉬며 다시 한번 시야를 들었다.

피투성이의 손아귀 너머로 황제, 세르비우스, 타르퀴니우스... 그리고 리비아가 보였다.

알파-3가 조용히 말했다.

“글록. 이 결투는 단순한 결투가 아닙니다. 이 아이의 생존 확률이 13%에서... 0%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글록의 몸이 흔들렸다.

그 모든 시선을 뒤로하고 도미티아누스의 작은 속삭임이 콜로세움의 소음 속에서 글록의 귓가에 맴돌았다.

“제발... 리비아를 지켜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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