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마르쿠스, 로마가 버린 양심

한 아이를 위한 전장

by 한자루




마르쿠스는 태어난 해부터 피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북부 갈리아 전선의 백부장이었고, 전쟁이란 그의 가정에선 당연한 풍경이었다.

아이가 처음 본 세상은 포효하며 달려드는 야만족도, 칼날이 부딪히는 불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불타는 마을이었다. 그것이 그의 첫 기억이었다.

두 번째 기억은 더욱 잔혹했다.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손을 차갑게 식어가는 순간까지 잡고 있던 자신의 손.

그때부터였을까 로마의 승리도, 패배도, 신의 이름도 그에게는 모두 같은 냄새를 가졌다.

그것은 진하디 진한 피 냄새였다.


열세 살이 되던 해, 마르쿠스는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그날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전장은 기다리던 것처럼 흙과 피를 배불리 삼키고 있었다.

진흙탕 위에 쓰러진 병사들의 손가락은 마치 하늘을 붙잡으려는 듯 뻗어 있었고, 어떤 이는 아직 죽어가는 중이었다.

마르쿠스는 떨리는 숨을 참으려 애썼다.
아버지가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준 단검은 지금도 축축한 손바닥에서 미끄러질 것 같았다.

“전사는 명령을 먹고 산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했다.

오늘 그 명령은 하나였다.

‘앞에 오는 자를 모두 죽여라.’

마르쿠스는 아직 그 명령의 무게가 살인을 의미한다는 걸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고 있었다.

전장 한쪽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르쿠스는 고개를 돌렸다.
불길과 연기 사이, 흙 묻은 얼굴을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갈리아의 소년병이었다.
나이로 보아 마르쿠스보다 한두 살 어린아이였다.

소년의 손에는 너무 큰 창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무게에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두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소년병은 겁먹은 사슴처럼 눈을 크게 뜬 채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무서워요. 집에 가고 싶어요...”

그 말은 이 전장 전체에서 유일하게 ‘아이’의 목소리였다.

마르쿠스는 단검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

명령을 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로마가 말하는 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과 같은 어린아이였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소년병은 젖은 신발 속에서 발을 떨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제발... 집에...” 그 말은 끝나지 않았다.

마르쿠스의 손이 흔들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명령이, 로마의 짐이,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그는 정말 인지도 모르게 단검을 내리그었다.

칼날은 훈련에서 그렸던 원보다 훨씬 작고, 훨씬 흔들리며 지나갔다.

소년병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입술이 열리다 말고, 그 작은 손이 마르쿠스의 팔을 붙잡았다.

마르쿠스는 그 손의 온기를 느꼈다. 아직 살아 있는 아이의 체온.

그 손이 서서히 그의 팔에서 떨어졌다.

소년병의 몸은 진흙 속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비와 피가 섞여 내려오며, 붉은 물과 빗물이 아이의 얼굴을 적셨다.

마르쿠스는 숨을 쉬지 못했다. 아니, 숨은 쉬어졌지만 그게 살아 있다는 의미로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뒤로 주저앉아, 서서히 식어가는 소년병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 거야...?”

그의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세상은 이미 전투의 잔향 속에 잠겨 있었고, 아이의 첫 살인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밤, 마르쿠스는 텐트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구토했다.

전장은 그에게 처음으로 ‘승리’가 아니라 ‘죽음’을 가르친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마르쿠스는 깨달았다.

“로마의 모든 승리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다.”

그 깨달음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날 밤 갈리아의 숲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그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평생 후회하게 될 첫 문장을 어두운 밤에 속삭였다.

“나는 아버지처럼 될 것이다... 무섭더라도.”


그날 이후 마르쿠스는 달라졌다.
그는 로마의 칼이 되기로 결심했다. 칼은 판단하지 않는다. 칼은 주저하지 않는다. 칼은 감정이 없다.

그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점점 능숙해졌다.

단검은 검이 되었고, 검은 군단의 방패가 되었다.

병사들은 그를 전쟁의 신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여전히 첫 번째 소년병의 얼굴을 기억했다.

언제나 비에 젖은 얼굴.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그 떨림. 그가 아무리 눈을 감아도 소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깨달았다. 로마의 승리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병사들은 그를 존경했고, 황제는 그가 “충성을 위해 잔혹함도 감수하는 남자”라 믿었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마음속엔 언제나 이런 질문이 있었다.

“내가 지킨 제국은 정말 가치가 있는가?”

그는 그 질문을 묻어두고 살았다. 그저 전쟁의 칼, 황제의 개처럼.


검투사 도미티아누스가 처음 끌려왔을 때 마르쿠스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남자는... 진짜 전사다.”

도미티아누스의 눈빛은 맑았다. 아무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없었다.
오직 하나만 있었다. 딸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

마르쿠스는 전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그에게서 보았다.

도미티아누스는 마르쿠스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탁이오. 리비아만은... 제국의 손에 죽지 않게 해 주시오.”

그 말은 마르쿠스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자신의 과거, 자신의 죄, 자신이 죽였던 소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내가 리비아를 지킬 것이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로마에 균열을 느꼈다.


마르쿠스는 글록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도 도미티아누스에게 느꼈던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좀 더 강렬하고 다른 색깔의 그것이었다.

마르쿠스는 그 이방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다.

칼을 든 전사들의 움직임과는 다른 이방인의 동작.

그러나 그가 글록을 돕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는 글록이 리비아를 볼 때 그 눈이 도미티아누스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리비아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제국과 신을 미워했다.

그는 칼자루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내가 로마의 칼이라면... 이제 그 칼로 로마를 벤다.”

황제가 리비아를 끌어내오던 순간, 마르쿠스는 더 이상 로마의 군단장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한 아이의 생명을 지키려는 늙은 전사였다.


도미티아누스가 사자에게 찢겨 죽던 그날 밤, 타르퀴니우스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군단장님. 황제께서는 리비아를 신에게 바칠 것을 원하십니다.”

마르쿠스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네놈들이 부르는 그 ‘신’은 인간의 공포를 먹는 괴물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잠시 마르쿠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미소는 언제나 온화했지만, 그 눈동자만은 아무 생명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촛불 하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희망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 희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왔습니까? 희망이란 괴물의 다른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 눈빛에는 연민과 조소가 섞여 있었고, 곧 잔혹하게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르쿠스 님. 그럼에도 황제는 그 희망이란 괴물에게 제물을 바쳐 제국을 지켜왔습니다. 로마의 평안, 국경의 안정, 황제의 권위. 이 모두가 유지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누군가는 피를 내야 합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게다가 아이는 특별합니다. 혈통도, 상징도, 모든 징조가 가리키는 바가 그 아이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죠. 시대가 선택한 것입니다.”

마르쿠스의 턱이 굳어갔다.

타르퀴니우스는 마르쿠스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연민도, 분노도, 두려움도 없이 마치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자’의 눈이었다.

그가 조용히, 그러나 너무도 부드럽게 말했다.

“부정한다고 해서 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군단장님. 제국은 늘 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린다. 리비아 한 아이의 미래와 로마 수백만의 내일.”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어떤 쪽이 더 무겁습니까? 군단을 이끌던 분이라면... 이미 답을 알고 계실 텐데요.”

그 문장이 마르쿠스의 흉골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마르쿠스는 눈을 감았다가, 느릿하게 칼을 뽑았다.

“아니. 이번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금속이 갈리는 듯했다.
“이번엔, 제 방식으로 선택하겠다.”

타르퀴니우스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

“그 선택이야말로, 제가 예견했던 길입니다.”

그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에는 이미 글이 적혀 있었고, 먹물이 마르쿠스와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도미티아누스의 딸 제물로 봉납됨. 결과 확정.’

마르쿠스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뭐지, 이건.”

타르퀴니우스는 종이를 살짝 접었다.

“기록입니다. 미래의 기록이죠. 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정해진 것을 확인하는 것뿐.”

그리고 더 낮게,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군단장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이 종이의 글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눈이 서늘하게 가늘어졌다.
“그 선택이 돌아가는 경로가 달라질 뿐이죠.”

마르쿠스는 칼을 움켜쥐었다. 힘줄이 튀어나오고, 이가 갈렸다.

타르퀴니우스는 마르쿠스를 등지고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마지막 경고는 이미 드렸습니다. 이제 군단장님이 어떤 끝을 맞는지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마르쿠스는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멀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직도 그의 귀 옆에서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그때, 문득 아레나의 모래 위에서 피투성이로 일어난 이방인이 떠올랐다.
그 눈. 죽어가는 몸으로도 끝까지 서려는 그 끈질김.

마르쿠스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용맹이 아니었다. 저건 다른 무엇이었다. 로마의 전사가 가진 힘이 아니라 로마 바깥에서 태어난 어떤 가능성.”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만약... 만약 내가 그 이방인과 손을 잡는다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로마의 군단장이라면 쉽게 해서는 안 될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낮게, 자신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 남자는 로마가 만든 어떤 괴물보다도 강했다.”

그 말은 희망의 고백이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는 전사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더 이상 무언가를 잃을 수 없는 자리로 몰린 인간이 마지막으로 붙잡는 ‘불확실한 가능성’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마르쿠스의 집을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세르비우스만... 정리하면 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느껴지던 ‘시선’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는 척했다.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절대로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깊고 기묘한 곡선이 생겼다.

“슬슬... 재미있어지는군.”

그리고 타르퀴니우스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르쿠스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리비아가 다음 제물이 될 거란 사실은 그의 마지막 인내심을 끊었다.

타르퀴니우스의 발걸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남은 건 침묵이었다.

침묵, 그리고 마르쿠스의 거친 숨. 그는 양피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도미티아누스의 딸. 제물로 봉납됨.’

문장 하나가 칼날처럼 그의 머리를 쪼갰다. 종이를 쥔 손이 흔들렸다.

아니, 손뿐 아니라 그의 전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군단장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수천의 목숨이 오가는 전장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지금 막아야 할 것은 군대도, 야만족도, 외적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래.’ 이미 적혀버린 미래였다.

마르쿠스의 눈이 핏줄로 뒤덮였다.

그는 칼을 꽉 쥐고, 갑옷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폐허처럼 어둡게 뒤틀린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돌길 위에서 크게 울렸다.

쾅! 쾅! 쾅!

경비병들이 놀라 마르쿠스를 본다.

“군단장님? 무슨...”

“비켜!!”

마르쿠스의 외침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병사들은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얼어붙었다.

영혼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 전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마르쿠스는 리비아가 갇혀있는 감옥을 향하여 달려가며 속으로 외쳤다.

“정해진 미래라면 내가 직접 부숴버린다!!”

그리고 그는 전력으로 달렸다.

소란에 선잠이 들었던 리비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마르쿠스는 리비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일 기회가 올 것이다.”

리비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좋은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인가요?”

마르쿠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평생 슬픔을 삼켜온 남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글쎄다. 나는 나쁜 일을 많이 했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구나.”


리비아와 글록이 탈출하던 지하 통로.
어둠 속에서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굽처럼 울리는 금속성 충격음의 주인공은 시안-10이었다.

인간이 아닌 속도로 달려오는 저 괴물은 세르비우스가 만든 괴물 중 가장 완성된 형태의 전사였다.

마르쿠스가 철창 레버를 잡고 글록을 바라봤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까지 10초. 그 안에 저 문을 통과해야 해.”

“마르쿠스...”

“나도 안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야. 도망이지. 하지만 어떤 도망은 싸움보다 어렵다.”

그는 마지막으로 리비아를 보았다.

“리비아. 네 아버지는 전사였다. 나는 이제... 그가 네게 남긴 마지막 방패다.”

그리고 철창을 당겼다.

거대한 쇳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가! 저 끝이 배수로다! 어서!” 마르쿠스가 외쳤다.

글록이 돌아보려 하자, 마르쿠스는 엄격하게 명령했다.

“이건 명령이 아니다. 부탁이다.”

그는 칼을 뽑으며 리비아에게 미소를 보였다.

“너의 아버지처럼... 인간답게 살아보마.”

습기와 피 냄새가 뒤섞인 좁은 배수 통로는, 도망치는 리비아 일행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 정적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곧 그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있었다.

쿵... 쿵... 쿵...

철과 살이 뒤섞인 괴물, 시안-10이 어둠 속을 뚫고 다가오는 소리였다.

마르쿠스는 뒤돌아 섰다. 그의 숨은 거칠었지만, 눈빛은 전보다 더 맑았다.

“여기는 내가 막는다. 너희는 희망을 데려가라. 나는... 내가 그토록 믿고 싶었던 로마와 마지막으로 싸우겠다.”

그 말은 리비아에게 한 약속이자,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최후의 명령이었다.

어둠이 찢어졌다. 시안-10이 네 발짐승처럼 낮게 웅크리며 튀어나왔다.

벼락처럼 내딛는 몸, 바닥을 찍는 순간 금이 가는 돌바닥.

마르쿠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전선에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맛본 죽음의 냄새가 익숙한 듯 코끝을 스쳤다.

거대한 근육질 팔이 옆에서 날아왔다. 마르쿠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가로로 치켜들었다.

시안의 거대한 팔이 검에 부딪히자 충격에 검이 휘는 느낌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마르쿠스의 발이 바닥을 1m 넘게 밀려나갔다. 잠시 주춤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애초에 시안-10은 마르쿠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안-10의 시선은 점점 멀어지는 리비아에게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마르쿠스의 방해는 사실 조금도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시안-10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도를 보지 않는다. 오직‘명령된 목표’에 따라 움직인다.

귀찮은 마르쿠스를 일격에 마무리하고 리비아를 쫓기로 한 시안은 다시 짐승처럼 네 발로 달려 나왔다.

마르쿠스는 시안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 방향을 틀어 통로 옆 벽면으로 달려갔다.

“이곳은… 오래된 배수로의 분기 지점이다. 물길을 열면, 저놈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녹슨 금속 레버를 힘껏 잡아당겼다.

쿵-!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수문이 열린다.

아래쪽에서 쌓여 있던 강한 지하수압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좁은 통로 전체를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시안-10은 잠시 소음에 고개를 돌리다 발을 헛디디고 살짝 비틀거렸다.
네 개였던 다리를 억지로 둘로 결합한 몸은 강한 근육을 만들었지만 균형에 약한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틈에 마르쿠스가 몸을 던졌다.

그는 괴물의 팔을 양팔로 끌어안으며 외쳤다.

“넘어질 수 없다면 내가 너를 넘어뜨리겠다!”

시안-10의 육중한 몸이 물에 미끄러지며 한쪽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마르쿠스는 괴물 아래 깔리면서도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가라! 리비아. 미래가 앞에 있다. 미래로 가라.”

시안-10이 굉음을 내며 일어나려 했지만 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오며 몸을 흔들었다.

마르쿠스는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괴물의 주먹이 날아들 때 시안의 몸을 안고 온 힘을 다해 천장 기둥 쪽으로 밀어붙였다.

“로마의 하중 구조는... 네놈도 못 버틴다!”

쾅!!! 그 충격에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돌조각이 폭우처럼 떨어지며 시안-10을 ‘묶어두는’ 일종의 바위 감옥을 만든다.

무너지는 돌 속에서 시안-10이 다시 나오려는 찰나, 마르쿠스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짧은 로마식 투창 원래는 군단장만이 지닐 수 있는 장식용 무기였지만, 이제는 장식이 아닌 생사를 가를 최후의 병기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다.

괴물의 왼쪽 다리 관절 시안-9, 시안-8에서도 반복되던 ‘관절 조합의 비대칭’.

팔이 거의 분리될 듯 흔들리면서도 짧은 투창을 시안의 다리 관절에 박았다.

비록 관절을 부수지는 못해도, 괴물의 움직임을 10초 지연시킨다.

그 10초가 글록과 리비아에게는 생존의 10초였다.

그다음 순간.

시안-10의 팔이 뒤로 꺾이며 마르쿠스를 찢어버렸다.

핏물이 격류 속으로 섞여 사라졌다.


마르쿠스는 몸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숨도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먼지 속에 누운 채 저 굳게 내려진 철문 너머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리비아의 작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로마의 군단장이 아니라, 어린 소녀를 지키고자 한 아버지 같은 전사였다.

마르쿠스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이 괴물 놈아. 이제 넌... 못 지나간다. 리비아를 삼키려는 자는... 로마일지라도 내가 벨 것이다!”

기대었던 벽의 남은 돌더미가 무너지며 마르쿠스의 몸을 덮쳤다.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나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전선에서도, 로마에서도, 그 어떤 승리의 날에도 지어본 적 없는 미소였다.

“이제야... 전쟁이 끝나는구나.”

배수로의 어둠 속에서 한 늙은 전사는 마침내 휴식을 얻었다.

마르쿠스는 전쟁의 신이 만든 칼이었으나, 마지막엔 한 아이를 위해 부러지기를 선택한 인간이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