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음악들이 여럿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음악도 그 중 하나인데 늘 그렇듯이 단순히 듣기만 하는 음악보다는 그 음악에 얽힌 역사와 사연을 알고 듣다 보면 더 큰 감동이 올 것 같아 몇 자 적어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가수 현인 님이 1960년대 초반 발표한 노래 중에 "베사메무쵸(Besame Mucho) 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외국어 제목이었지만 당시로는 특이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또 모 전 대통령이 즐겨부른다고 해서 한 때 화제가 되었던 곡 이기도 하지요.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오기도 했고 또 많은 다른 영화의 삽입곡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래 전 기네스 펠트로우와 에단 호크가 주연으로 나오던 영화 '위대한 유산' 에서 주인공 커플이 이제는 쇠락해버린 볼룸에서 춤을 출 때 나오던 음악이 바로 베사메무쵸 였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BEWu26hz_tM
한국에서 소개될 때는 원곡의 가사 "많이(열정적으로) 키스해 주세요" 가 당시의 한국 정서에 맞지 않아 베사메무쵸가 마치 한 여성의 이름인 것처럼 번역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더군요. 한글 가사에 있는 리라꽃이니 산타마리아니 하는 단어들이 원곡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적어도 한국어 베싸메무초는 가사 면에서는 원 곡과 별개의 노래라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한국에는 현 인의 노래로 알려졌지만 그 외에 많은 외국 음악인들을 통해 이 곡은 처음 발표된 이래 꾸준히 세계 여러 곳에서 소개되어 왔습니다. 멕시코의 3인조 마리아치 밴드인 트리오 로스 판초스, 달리다,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사라 몬티엘 등 무수히 많은 가수와 악단이 이 음악을 연주했고 호세 카레라스나 플라시도 도밍고와 같은 클래식 아티스트들까지 전세계의 음악인들이 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아마 이 노래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특히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한 사람쯤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틀즈 도 그런 음악인 중의 하나인데 언듯 비틀즈의 음악과 베사메무쵸는 큰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무명 시절부터 이 음악을 연주했던 비틀즈는 레코드사 오디션에서 이 노래를 불렀고 나중에 이것이 그들의 앨범에 포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틀즈 팬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비틀즈의 명곡 Yesterday 와 베사메무쵸 사이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고 베사메무초를 좋아했던 폴매카트니가 분명 베사메무쵸의 영향을 받아서 Yesterday 를 만들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노래가 여러 나라 말로 불려졌지만 베사메무쵸라는 시작 부분의 가사는 거의 모든 언어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베사메무쵸라는 말로 노래가 시작되고 이 노래가 불리는 나라의 언어로 가사가 이어지다가 다시 베사메무쵸라는 가사가 중간에 등장하지요,
천천히 조금은 처지는 듯한 리듬으로 시작해서, 애절하게 그리고 때로는 관능적으로 들리는 여러 가수들의 해석과는 조금 다르게, 마치 키스해주지 않으면 큰 일을 낼 것 같은 박력과 에너지로 노래하는 루이스 미구엘의 베사메무쵸를 아래에 소개해 봅니다. 2012년 공연이니 이미 40대에 접어든 루이스 미구엘이지만 과거의 에너지가 여전한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g0jC0_fXN0
저는 개인적으로 카보베르데 출신의 전설적인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의 베사메무초가 좋습니다.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부르는 노래가 이별을 앞둔 마지막 밤 정열적인 키스를 원하는 마음을 한층 더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던 8 트랙 카트리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던 현 인의 떨리는 듯한 묘한 목소리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노래의 원곡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멕시코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콘수엘로 벨라스케스(Consuelo Velázquez, 1916-2005)가 만든 노래로 1941년에 스페인 출신의 배우이자 가수로 멕시코에서 활동 중이던 에밀리오 투에로(Emilio Tuero)가 처음으로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초로 이 노래를 녹음한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것은 콘수엘로가 이 노래를 작곡한 과정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l6cOm7g2I
콘수엘로의 부모님들은 콘수엘로에 앞서 딸을 낳았는데 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슬픔에 빠져있던 부모들에게는 콘수엘로의 탄생이 큰 위안이 되었고 그래서 위안과 평안 이라는 의미를 지닌 콘수엘로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4살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6살에 최초로 연주회를 할 정도로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10년 대에 있었던 멕시코 혁명 기간에 군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가세가 기울었지만 어머니의 지원으로 피아노 공부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멕시코 국립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멕시코 시티에 있는 예술의 전당(Palacio de Bellas Artes)졸업 발표회를 했을 때는 관객 모두가 말을 잃을 정도의 연주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 날의 공연을 잊지 못 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자주 회상할 정도 였으니까요. 지난 2005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추모한 곳도 바로 그 예술의 전당이었고 보면 그녀는 참 행복한 곳에서 사람들의 배웅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 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전문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음악계에 진출을 했고 멕시코 시티의 라디오 방송국 인 XEQ 에 소속되어 연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때 그녀는 방송국에서 여러 음악인들을 만나며 교류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 곳에서 만난 방송국의 고위 인사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이 무렵 친구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그녀는 클래식이 아닌 일반적인 대중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또 그런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정통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교육을 받았지만 작곡은 독학으로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녀의 음악에서는 일반 대중 음악 작곡자들에게 찾아 보기 힘든 정통 클래식의 풍부한 화성이 들어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연주하던 음악 중의 하나가 바로 베사메무쵸 였습니다.
실제 이 음악은 그녀가 16살이던 무렵 당시에 연습하고 있던 한 클래식 연주곡의 테마에서 영감을 얻어 1932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음악이 만들어지고도 한 동안 가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19살이 되었을 때 가사를 붙였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까지 그녀는 전혀 키스를 해보지 않았다고 종종 말하곤 했답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키스해 달라는 노래를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친구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이 노래는 1941년에 가수인 에밀리오 투에로(Emilio Tuero)가 만든 앨범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도 누가 작곡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콘수엘로는 이 노래를 연주하면서 그저 한 친구가 작곡한 노래하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공식적인 레코드로 발표가 되고 또 방송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습니다. 레코드 회사의 집요한 질문에 계속해서 친구라고 대답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작곡자임을 밝혔다고 하는군요. 정통 클래식 연주자가 멕시코의 유행가 스타일인 볼레로(Bolero) 음악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래에는 1990년 무렵 노년의 콘수엘로 벨라스케스가 출연한 TV 방송입니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클래식 연주자로서 교육받은 그녀의 배경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u0bX5gBCRw
그렇게 1941년에 발표된 노래는 금새 멕시코에서 유행하게 되었고 몇 년 후 지미 도르시 오케스트라가 영어 가사를 붙여 미국에서 발표해서 빌보드 차트에서 몇 주간 1 위를 할만큼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당시에 이 노래의 성공을 좌우하게 만든 몇 가지 외부적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라디오 방송국에서 음악을 방송하기 위해서는 저작권자들에게 이용료를 지불합니다. 194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이 일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에서 저작권 이용료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올리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라디오 방송국들이 모여 이 회사에서 저작권을 관리하는 음악들은 더 이상 라디오에서 방송하지 않기로 결의를 하고 방송국들이 모여 새로운 저작원 관리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 만들어진 회사에서 관리할 새로운 음악들을 미국은 물론 해외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멕시코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베사메무쵸가 이 회사에서 처음 저작권을 관리하기 시작한 노래였지요.
비슷한 시기에 음악 연주인들과 레코드 회사 사이에서 연주인들이 받는 터무니없이 낮은 수입과 관련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 2년 정도 연주인들의 파업으로 인해 새로운 레코드를 내는 회사가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주인들과 최초로 타협한 회사가 데카(Decca) 라는 회사였습니다. 다른 레코드 회사는 아직 합의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앨범을 낼 수 있던 회사가 데카였고 그 회사에서 연주인들과 타협한 후 처음 펴낸 음악이 바로 베사메무쵸 였습니다. 다른 새로운 앨범이 시장에 없는 상황에서 이 노래가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리고 1940년대 초반은 세계 2차 대전 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과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이별을 하고 전쟁터로 떠나는 이들에게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인 것처럼 키스해 달라는 이 노래의 가사는 더 절실하게 와 닿았고 젊은이들은 이 음악을 유럽의 전장에까지 가지고 갑니다. 전쟁으로 헤어지게 된 연인들의 노래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퍼진 이 노래는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퍼지게 되었고 결국 북미는 물론 유럽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지요.
90년대 중반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녹음되고 불려진 스페인어 노래로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이 노래의 스페인어 가사인 Bésame, bésame mucho, / Como si fuera esta noche la última vez (키스해 주세요 아주 많이, 마치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는 미국에 소개 되면서 Bésame, bésame
mucho, / Each time I cling to your kiss, I hear music divine(키스해주세요 아주 많이, 당신과 키스할 때마다 나는 천상의 음악을 듣습니다.) 로 바뀌면서 조금 더 감성적인 가사로 바뀝니다.
어찌보면 원래의 가사는 1940년 당시의 분위기로는 상당히 에로틱하게 받아들여 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지 1950년 초반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한동안 이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사 때문에 말입니다. 그 후 이 노래가 1960년대 초반 한국에 오면서 “열정적으로 키스해 주세요" 라는 가사는 어여쁜 아가씨의 이름이 되어 버리지요.
그런데 앞에서 이 음악은 콘수엘로가 정통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교육을 받을 때 연주했던 피아노 곡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고 했지요. 이제 이야기는 1941년에서 30년 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페인 출신의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1867-1916)는 1916년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자신의 오페라인 고예스카스(Goyescas) 를 초연합니다.
그리고 이 오페라에서 불리워졌던 아리아 중에 "Quejas, o la Maja y el Ruiseñor" ("Plaints, or the Maiden and the Nightingale"-비탄, 혹은 아가씨 그리고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의 아리아라고도 불림)라는 곡이 있는데 이것이 콘수엘로가 작곡한 베사메무쵸에 영감을 준 곡이라고 합니다. 이 아리아의 멜로디를 따서 베사메무초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전설적인 소프라노인 몽세라 카바예가 부르는 나이팅게일의 아리아가 인터넷에 떠있더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베사메무쵸와는 다르지만 도입부분의 멜로디는 귀에 익으실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Su2XdM-iTc
이 오페라가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성공을 거두지도 못 한 채 그라나도스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제 1 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영국 해협을 건널 때 그가 타고 가던 여객선이 독일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그라나도스는 47세로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일설에는 자신은 무사히 구명 보트에 탈 수 있었으나 아내가 미처 타지 못 한 것을 보고 아내를 구하러 물에 뛰어 들었다가 같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며칠 전 다른 배를 타고 돌아가게 되어 있었으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윌슨이 그라나도스에게 백악관에 와서 연주해 줄 것을 청하는 바람에 일정이 늦어지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이러한 비극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지요.
더욱더 아이러니한 일은 어뢰의 공격을 받은 배가 앞,뒤 반 쪽으로 쪼개졌는데 배의 앞 부분만 침몰을 했고 뒷 부분은 육지로 옮겨져 수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라나도스 부부의 선실은 뒷 부분에 있었지만 어뢰에 맞을 당시 이들은 배의 앞 부분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뒷부분 선실에 있던 승객 중 유일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이 부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아리아가 콘수엘로의 관심을 끌었을까요? 사실 이 아리아는 그라나도스가 오페라를 위해 작곡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피아노 소품으로 작곡한 멜로디를 오페라 아리아로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접한 것은 이 아리아보다는 이 아리아의 원곡으로 그라나도스가 1911년 경에 작곡한 피아노 소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6개의 피아노 곡으로 이루어진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소품집인 "Goyescas" 중 한 곡으로 작곡된 것이 바로 "Quejas, o la Maja y el Ruiseñor"인데 이 곡은 피아노 연주곡으로 요즘도 자주 연주되고 있습니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훈련받던 콘수엘로가 접한 곡이 아마 이 연주곡이었을 것이고 이 곡의 일부 테마를 바탕으로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aRaAV5fnW4
이 노래와 얽힌 예술가들 사이의 관계는 콘수엘로 벨라스케즈와 그라나도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911년에서 다시 100년 쯤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작품집 Goyescas 는 번역하면 '고야의 스타일을 따라" 정도로 번역이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고야는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입니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고야의 그림을 본 그라나도스는 예술가로서의 고야와 그의 일생, 그리고 그의 그림과 그림 속의 모델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는 "검은 벨벳과 대비되는 연분홍 빛 뺨 그리고 진주 빛 손과 흑옥의 장신구들, 이 모든 것에 나는 홀린 듯 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들을 보고난 그라나도스가 그 그림들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 바로 그의 피아노 소품집인 Goyescas 입니다.
결국 고야의 그림 속 아가씨들(Majas)이 오늘 날의 베싸메무쵸를 있게 한 시초가 되는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리라꽃 같은 귀여운 아가씨" 라는 한국 가사는 이 음악이 만들어지게 된 최초의 아이디어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의도한 것이었던 아니든 말입니다.
고야가 세상을 떠난지 200년이 되어 가고 그라나도스가 세상을 떠난지도 10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뒤늦게 베사메무쵸를 작곡한 콘수엘로 벨라스케즈도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베사메무쵸는 그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쩌면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아울러 고야의 많은 그림들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냥 스치듯 하는 말이지만 정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가 봅니다.
*베사메무초의 여러 가지 버전을 모아서 플레이리스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NOD4qcWqmAv1LxMJhqLwq4PVVU5R38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