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 탄생한 음악
1945년 2월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서는 몇 년째 이어지고 있던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독일의 패배가 눈에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여력을 쏟아 연합군에 대항하고 있던 독일군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공군은 독일의 군수 시설이 있고 또 교통의 요지라고 판단한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를 폭격하기로 결정합니다.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이어진 이 폭격에서 연합군은 1300여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서 약 4000톤의 폭탄과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을 투하했습니다. 그 결과 약 34 평방 킬로미터의 도시 전체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폭격은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독일의 교통 시설이나 군수 공장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 했다고 합니다. 대신 도시의 중심지에 폭탄이 투하되면서 엄청난 민간이 사상자가 생겼고 도시의 오래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는 참상을 나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24,000에서 40,000명 사이의 사망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물론 십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겼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가 심했던 거지요. 그리고 이러한 무고한 민간인 피해 때문에 이 폭격은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폭격을 통해 피해를 입은 것은 사람들의 생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작센 주의 수도로서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은 이 도시와 함께 해왔던 수많은 건물과 여러 문화 유적도 같이 파괴가 되었지요. 그렇게 파괴된 것들 중에는 1556년에 세워져서 예술과 인문학 등에 관련된 귀중한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던 작센 주립 도서관과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책과 귀중한 문서들도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2차 대전이 끝난 드레스덴에서 시작됩니다.
2차 대전이 끝이 나고 폐허로 변한 이 드레스텐의 한 사람의 이탈리아 인이 찾아옵니다. 레모 지아조토(Remo Giazzotto, 1920-1998)라는 이 사람은 밀라노 출신의 음학학자로서 17-8세기에 활약한 베니스 출신의 음악가인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0)의 전기를 집필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아조토는 알비노니의 전기와 함께 알비노니가 남긴 작품들의 목록을 만드는 일도 하고 있었는데 알비노니가 남긴 작품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드레스덴에 있는 주립 도서관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었지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아조토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드레스덴에 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남은 것은 폐허로 변한 도서관 건물과 다 타고 재만 남은 책들이었습니다.
비록 작센 주립 도서관에서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중요한 책과 문서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지만 지아조토가 찾던 알비노니의 작품들과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많은 문서들은 1945년 2월까지 여전히 도서관에 남아 있었고 폭격을 피해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혹시 미처 타지 않고 남아 있는 문서들이 없을까 생각하고 도서관의 잔해를 뒤지던 지아조토는 타다 남은 악보를 한 장 발견합니다. 그나마 그 한 장의 악보도 대부분은 타 버리고 베이스 라인의 음표 몇 개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아조토는 이것이 알비노니가 남긴 삼중주 소나타의 일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타다 남은 그 악보를 바탕으로 한 편의 느린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TDjwb4zjJQ
1950년대 말에 발표된 이 음악은 비록 지아조토가 작곡한 곡이었지만 알비노니의 음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지아조토 역시 알비노니에게 바치는 음악으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구태여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치 폐허로 변한 드레스덴과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알비노니의 작품을 비롯해서 파괴된 수많은 귀중한 문화유산들에게 바치는 조곡처럼 이 음악은 애절하고 또 장엄했습니다. 파괴된 드레스덴을 보면서 지아조토가 느꼈을 슬픔과 애통함이 음악 속에 여실히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부유한 종이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음악에 더 관심을 가지고 오페라와 성악곡들을 작곡하던 알비노니는 살아 있는 당시에는 제법 인기를 얻은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도 자신의 작품에 "베네치아의 초보자(dilletant)" 라고 작곡자의 이름을 붙일 만큼 반드시 음악을 해서 그 수입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고 몇 백년이 흐른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코렐리나 비발디 등에 비해서 아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지아조토가 알비노니의 이름으로 달고 발표한 아다지오가 여러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이 음악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동시에 알비노니의 이름도 같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중에 이 작품의 진짜 작곡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기도 했고 지아조토가 발견했다는 불타다 남은 알비노니의 악보가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이 음악의 저작권은 아직까지 지아조토가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그 사실만으로도 이 음악의 작곡가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겠지요.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G 단조 아다지오로 알려진 이 음악은 요즘도 자주 들을 수 있는 음악이지요. 클래식 연주자들 뿐만 아니라 잉위 맘스틴 이나 프로콜 하럼, 라라 파비안, 사라 브라이트만 같은 대중음악 연주자들도 연주하였고 또 가사를 붙여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아래에는 라라 파이반이 부르는 아다지오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AWQxIq-9-Q
이처럼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탄생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그 후 또 다른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음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92년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던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사라예보는 몇 달째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의 위협 아래에 있었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언덕에 자리를 잡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사살하던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의 활동 때문에 사라예보 시민들은 언덕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만을 찾아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식량과 물을 구하기 조차 힘들었습니다.
1992년 5월 27일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총을 피해 건물 사이로 움직이며 하루하루를 이어갈 빵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한 빵가게에서 빵을 만들어 판다는 소식이 들렸고 사람들은 빵을 사기 위해 그 가게 앞에서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민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왔습니다.
빵을 사서 그동안 굶주리고 있던 가족들과 나눌 생각을 하며 줄을 서 있던 사람들에게 날아온 포탄은 그 자리에서 22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또 100여 명의 부상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멀리 언덕 위에서 날아온 이 포탄은 총을 든 군인들과 그저 하루하루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빵을 생각하며 또 하루를 넘길 희망에 부푼 사람들이 서 있던 거리는 순식간에 끊어진 팔다리와 흘러내린 피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가득 찬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러한 참상이 사라예보의 시민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죽고 다치는 사람들의 숫자에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일은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지요. 천만다행으로 오늘은 그 와중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가지만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거리에서 비슷한 어떤 일이 벌어져서 이번에는 차가운 시신으로 누워있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5월 27일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완전히 부서진 그 거리에 그다음 날 한 사람의 첼리스트가 찾아왔습니다. 비록 남루했지만 무대에 선 사람처럼 검은 연주복을 입고 큰 첼로 케이스와 연주용 의자를 들고 그 자리에 나타난 이 사람은 의자를 내려놓고 첼로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어제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듯 느리고 장엄한 그러면서도 애절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비노니의 G 단조 아다지오였지요.
베드란 스마일로빅(Vedran Smailovic)이라는 이 첼리스트는 전쟁 전까지 사라예보 필하모닉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쟁과 함께 음악 활동을 못하게 된 스마일로빅은 다른 사라예보의 시민들처럼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2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빵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목숨을 잃은 그 사건은 그에게 평화와 희망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것은 22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을 기억하며 22일 동안 연주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언제 포탄이 또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매일같이 22일 동안 그 자리에 나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습니다.
그가 연주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저격수들과 포탄의 위협 때문에 열린 거리에 나오지 못하고 근처의 건물 아래에 몸을 숨긴 채 첼로로 연주되는 아다지오를 들으며 슬픔을 달래고 또 평화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스마일로빅은 1993년 사라예보를 떠나 북아일랜드로 옮겨갈 때까지 사라예보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 자신의 첼로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용감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또 예술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을 반대한 가수로서 유명한 존 바에즈는 스마일로빅의 행동에 용기를 얻어 1993년 사라예보를 방문하고 시민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스마일로빅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녀뿐만 아니라 영국의 작곡가인 데이비드 와일드(David Wilde)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Cellist of Sarajevo)'라는 무반주 첼로곡을 작곡해서 전쟁과 파괴의 슬픔 그리고 평화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습니다. 물론 스마일로빅의 용감한 행동에 대한 찬사도 들어있었겠지요. 그리고 1994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국제 첼로 페스티벌에서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라 할 수 있는 요요마가 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그 연주 현장에 있었던 폴 설리반이라는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전합니다.
"조용히,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음악은 시작되었고 웅성거리는 연주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는 죽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길한 메아리로 가득 찬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함치며 격렬한 열정으로 우리 모두는 사로잡아 갔고 마침내 죽음 직전의 공허한 마지막 한숨으로 변해갔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했던 그 순간처럼 고요함으로 돌아갔다.
연주를 끝내고도 요요마는 여전히 첼로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활을 든 그의 손도 여전히 첼로에 놓여있었다. 연주장에 있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소름 끼치는 학살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그렇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연주장에서 요요마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나 관객석을 바라보면서 손을 뻗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요요마의 손길을 따라 모든 눈이 모아졌고 그 손길이 부르는 사람이 베드란 스마일로빅, 바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청중들은 표현할 길 없는 충격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마일로빅은 요요마가 무대 쪽으로 걸어갔고 무대에서 내려온 요요마는 통로로 내려가 활짝 열린 팔로 스마일로빅을 껴안고 그들은 열정적인 포옹을 하였다.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모두 일어났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며 귀가 먹먹할 정도로 환호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의 가운데에는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부드럽고 세련된 클래식 음악의 왕자로서 빈틈없는 연주와 외모를 보여주는 요요마가 있었고 사라예보에서 금방 빠져나와 여전히 얼룩투성에에 낡고 주름이 잡힌 가죽점퍼를 입은 스마일로빅의 얼굴, 그토록 많은 눈물에 젖고 고통과 상처에 지쳐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빗지 않은 긴 머리와 큰 콧수염에 싸여 있었다."
과연 폴 설리반의 표현이 적절했는지 요요마가 연주한 그 음악을 한 번 들어보시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Q2zIg89UW6Q
1993년에 사라예보를 떠난 스마일로빅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제적인 관심은 뒤로 한 채 북 아일랜드의 조용한 시골에 묻혀 음악을 작곡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조용한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그의 이름이 다시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는데요. 캐나다 출신의 한 젊은 작가가 스마일로빅의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한 편의 소설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갈로웨이(Steven Galloway)가 쓴 사라예보의 첼리스트(The Cellist of Sarajevo)는 비극의 현장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한 첼리스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러나 매우 감동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는 가족들이 마실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 저격수들의 총알이 날아드는 도시의 거리를 가로질러야 하는 사람들과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첼리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뒤에서 숨어 혹시 있을지 모를 저격수를 노리는 또 다른 저격수의 이야기 등, 전쟁의 참화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감동을 받은 소설입니다만 씁쓸한 이야기도 있더군요. 소설의 작가는 분명 스마일로빅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고 누구나 스마일로빅을 연상할 수 있는 등장인물을 삽입하지만 실제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출판한 이후에도 스마일로빅과는 아무런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한 것을 알게 된 스마일로빅은 매우 언짢아했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런 씁쓸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참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서 소개되었으니 한 번 찾아보십시오.
* 이 글은 2008년에 한 블로그에서 발표했던 글을 다시 가다듬고 링크를 수정해서 올리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