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은 끝이 났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시간이 왔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는 장면은 남북 화합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사상 최초로 결성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은 스포츠의 이름 아래 한민족이 힘을 합친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을 포함해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부위원장,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김일국 체육상 등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잇달아 방한하여 남북 고위급 교류의 장을 열었다.
물론 마땅히 주인공이 되어야 할 체육인을 뒷전으로 미루고 정부의 정치 과제를 앞장 세웠다는 따가운 질책은 피할 수 없으나, 향후 전개될 남북-미북 정상회담 레이스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청와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남북은 이미 평창 동계 올림픽 이전인 1월 9일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북한 고위급 인사의 방한을 약속하였으며 남북 대화 재개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등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2018년 3월에는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수석 특사로 한 '대북특별사절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정 수석 특사는 방북에 앞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확고한 뜻과 의지를 분명히 전달"하겠다 다짐했다.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면담한 대북특별사절단은, 정상 간 '핫라인' 개설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 약속에 더해 "4월 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겠다"라는 소식까지 양손 가득 들고 돌아왔다. 이렇게 '2018 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10.4 남북정상회담' 이후 11년 만에 개최되는 남북 지도자의 만남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신 또한 취재에 참가하고자 몸이 달아있었다.
그러나 회담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직접 취재는 제한적이었다. 청와대는 우선 '춘추관'에 등록된 국내 기자를 중심으로 취재단을 구성한 뒤 '서울외신기자클럽' 소속 외신기자를 몇몇 추가하여 '공동취재단'을 꾸렸다. 단, 공동취재단으로 취재에 투입된 기자는 본인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공표할 수 없었고 관련 르포나 에세이 등의 저작 또한 불가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나머지 기자들과의 형평성을 위해서였다.
4월 27일 08시. 문재인 대통령은 판문점을 향해 길을 나섰다. 대통령을 태운 차량 행렬은 꽃다발을 흔들며 늘어선 시민의 품을 지나 통제된 도로를 따라 거침없이 내달렸고 09시께 판문점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민족의 분단 혹은 화합의 상징인 판문점까지 겨우 1시간 남짓이었다.
「27일 오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시민과 문재인 대통령이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
09시 30분. 판문점 북측 건물인 '판문각'의 문이 열렸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검은색 인민복 차림의 김 위원장은 군사분계선 위에 놓인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건물 사이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환한 미소와 악수로 첫인사를 나누었고, 문 대통령의 손짓에 따라 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사상 처음으로 남측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측으로 넘어와 문 대통령과 함께 남북 사진 기자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이때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자 김 위원장이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라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5cm 높이 콘크리트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의 턱을 넘어 북한 땅을 밟았다.
한 걸음, 딱 한 걸음. 그저 한 발을 넘기기만 해도 쉽게 닿는 그곳에 남과 북의 땅이 나뉘어 있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돼 장장 70년간 이어진 민족 분단의 허무함이 그곳에 있었다. 총칼을 내세워 민족을 둘로 갈라버린 김일성의 손자와 한국전쟁 피난민의 아들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만남에서부터 작별 인사까지 12시간. 11년 만의 만남은 숨 가쁘게 진행됐다. 판문점 한편에 정전협정이 있었던 1953년생 소나무를 심고 한강 물과 대동강 물을 뿌렸다.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염원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둘만의 단란한 산책 시간도 있었다. 북한 비핵화 이후 한반도에 펼쳐질 평화롭고 희망찬 미래를 담은 USB도 전달했다. 남북 지도자 부부 동반 만찬과 고위 인사들의 화목한 시간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다시 만나자!"라며 뜨겁게 포옹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 1층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후 악수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
판문점은 여러모로 신기한 공간이다. 같은 땅덩어리 안에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남과 북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한 걸음 걸어 들어갔을 뿐임에도 30분이 사라지고 또 생겨난다. 실제로 취재 기자들 사이에 휴대전화 표시 시각이 어긋나는 일도 있었다. 여태껏 온갖 매체를 동원해 서로를 물어뜯기 바빴던 남북의 정치인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때로는 어깨동무도 하고, 크게 웃는다. 만찬장에서 주고 받은 술잔에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새빨개지기도 했다. 그곳에는 같은 카메라, 같은 언어, 같은 얼굴로 취재하는 남과 북의 기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걸음 빠져나오면, 그곳엔 대한민국과 북한의 분단과 대립이 그대로 놓여있다. 정상회담을 위해 온종일 동분서주 뛰어다니던 김여정 부부장도, 청와대 참모진도, 남북의 기자들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영악한 자와 지키지 않을 약속에 또 한 번 속아 넘어가 주는 어리석은 자만이 남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온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고 허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