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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싱가포르미북정상회담

by 김코알라

줄타기는 끝이 났고 이제 본 게임만 남았다. 필자는 회담에 며칠 앞서 싱가포르에 들어갔다. 싱가포르 창이(Changi) 공항에 도착하자 곳곳에 배치된 경찰 인력이 눈에 띄었다. 앞서 싱가포르 경찰 당국은 며칠 뒤 펼쳐질 미북정상회담을 '보안강화특별행사'로 지정하고 군경의 준비태세를 강화했다. 시내로 향하는 택시 차창 너머로 가로등마다 빼곡하게 내걸린 미북정상회담 깃발이 나부꼈다.


한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숙소인 '세인트 레지스 호텔' 앞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 카메라 명당자리를 지키기 위한 '뻗치기'가 한창이었다.


20180611_094549.jpg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숙소인 '세인트 레지스 호텔' 앞에 늘어선 취재진들」


한여름 싱가포르의 날씨는 혹독했다. 뜨거운 태양빛과 숨통을 조여 오는 습기 덕분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럼에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사투를 벌이는 기자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3일째 되던 날로 기억하는데, 국내 언론사의 카메라 기자 한 명이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흔히들 기레기 기레기 하지만 단 한 건의 보도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거듭하는 멋진 기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부디 기억해주길 바란다.


날짜가 바뀌고 현지 시각 6월 10일 오후 2시 30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필자는 김 위원장이 탑승한 항공기가 도착하는 순간과 시내로 향하는 차량행렬을 촬영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DSC_0039.JPG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에어차이나 CA61편이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착륙하고 있다」


몇 시간이고 공항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촬영 포인트를 찾고 셔터를 눌러댄 끝에 가까스로 김 위원장이 탑승한 에어차이나 CA61 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후 차량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외부 주차장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데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취재 가방은 무겁고,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뜨겁고 습한지... 사진기자들이 왜 그렇게 항상 화가 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DSC_0058.JPG 「싱가포르 창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차량 행렬」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있어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은 '보통의 지도자'로 세계 무대에 데뷔하는 기회가 됐다. 현대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형적 독재자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국빈 방문과 같이 비행기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기도 하고, 늦은 저녁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시내 관광'도 하고,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등 여태껏 꼭꼭 숨어 다니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싱가포르 현지 프레스 센터에 앉아 주관방송사인 채널 뉴스 아시아(CNA)가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미북정상회담의 면면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가 멋진 미소를 자랑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오찬 회의를 했다. 때로는 느긋하게 산책하며 담소를 나눴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모습이었기에 평창에서 만난 '가짜 트럼프-김정은'이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는 진짜였다.


3월 초부터 꼬박 세 달을 들여 준비한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은 싱겁게 끝이 났다. 거대한 담론의 대타결도 없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성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양국 정상이 서명한 합의문을 보면, 미국과 북한의 새로운 관계 설립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rarization)'를 위한 노력 등이 적혀있었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대면했다는 이름값에는 한참 못 미치는 어딘가 미적지근한 합의문이었다.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은 과연 북한 비핵화의 진전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미북관계 개선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세간의 평가는 극명히 갈렸다. 그 단적인 예를 보자면 아래와 같다.


통일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회담 직후 발표한 '북미정상회담 평가 및 향후 전망'에서 "(미국과 북한) 양국 간 신뢰 형성과 관계 정상화의 토대를 구축했다"라고 평가했다. 합의문에 CVID라는 표현 대신 '완전한 비핵화'가 채용된 점에 대해서도 "회담 결과에 대한 저평가의 이유가 되기 어렵다"라며 비핵화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으므로 향후 후속 협상의 전망은 밝다고 말했다.

반면, BBC는 2018년 6월 15일 자 기사 '북미정상회담은 어떤 결과를 낳았나'를 통해 "이번 정상회담은 그 어느 것에 대한 해답도 제공하지 못했다"라고 혹평했다. 북한은 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진정으로 핵 미사일을 포기할 의사가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2018년 최대의 이벤트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지금 우리 주머니에는 어떤 성과, 어떤 유산이 남아있는가.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은 여전히 핵-미사일을 양손에 쥐고 핵무력 강국을 건설하고자 혈안이며, 한국 정부가 아무리 납작 엎드려 남북교류를 요청해도 완벽히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더해 미북관계로 재미를 보던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함에 따라 미국을 필두로 한 북한 비핵화 논의의 모멘텀은 무너져 내렸다.

역사에 한 획, 아니, 열 획은 그었을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이 그저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로 소모됐다. 당시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어댔던-그러면서 달콤한 꿀을 빨아먹었던-국내외의 정치인들, 학자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애석하기 그지없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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