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성원해 주신 덕분에 평양에 잘 다녀왔습니다".
2018년 8월 13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북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만나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을 가졌다. 남북은 이 자리에서 판문점 선언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오는 9월 중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필자의 소속사는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갖는 의미와 예상되는 성과에 대한 분석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보다 심도 깊은 분석을 얻기 위해 외교 통일 분야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을 인터뷰했다. 회담을 목전에 둔 시점에 당시의 석학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잠시 소개해 본다.
신범철 센터장은 인터뷰에서 전 세계 언론의 최대 관심사이자 남북정상회담의 근본 의제인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해, 과거에도 남북 간에 비핵화를 약속해 왔지만 "실질적인 진전이 없었다"라고 꼬집었다. 그렇기에 이번 '평양남북정상회담'이 "계속 대화를 끌고 갈 수 있느냐, 아니면 좌초돼서 과거로 돌아갈 것이냐"를 결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와 진정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공개석상에서의 표현"이 중요하다며, "김 위원장이 구두(口頭)로 한다면 진정한 비핵화 의지가 된다"라고 말했다. 북한이 과거 6자 회담 등에서 보여온 행태, 서면으로 합의했던 것들을 손쉽게 뒤엎어왔던 전례를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한편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콘텐츠'는 없이 '이벤트'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 "콘텐츠가 따라주지 않으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평창올림픽'과 '판문점 선언'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문 정부였으나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니 "'또 속았나?' 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라는 것이다. 오랜 기간 대북 문제를 다뤄온 석학의 뼈아픈 비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8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여사와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9월 18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공군 1호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그의 아내 리설주가 직접 공항으로 나와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영접했다. 공식환영행사는 북한군 명예위병대(한국의 의장대에 해당)의 사열로 시작되었는데, 사열 보고에서 명예위병대장 육군 대좌 아무개가 문 대통령을 "각하"라고 존칭 하는 뜻밖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대통령을 '남조선 괴로군부의 우두머리'라고 욕보였던 것과 달리 "대통령 각하를 영접하기 위해 정열하겠다"라며 예를 갖춰 예식도를 치켜든 모습이 사뭇 새로웠다.
카퍼레이드 또한 압권이었는데,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동승한 차량이 평양 순안공항을 빠져나와 대통령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향하는 내내 길가에는 붉은 꽃 장식과 한반도기를 흔들며 문 대통령의 방북을 환영하는 북한 인민으로 가득했다. 실로 극진한 환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무개차를 함께 타고 백화원 영빈관으로 이동하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오후 3시 45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지난 6월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을 언급하며 "주변지역 정세가 안정되고 더 진전된 결과가 예상된다"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조미 상봉의 역사적 만남은 문 대통령님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과정은) 김 위원장님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라고 화답했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김 위원장의 결단에 사의를 표한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회담을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평화와 번영의 결실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라며 모두발언을 끝맺었는데, 이는 더 이상 말로만 해서는 안 되며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성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둘째 날 오전 10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찾아 약 70분간 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2차 정상회담을 마친 뒤 양 정상은 '9월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서명했으며,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인민무력상의 '9.19 군사분야 남북합의서' 서명과 이어서 남북 정상의 공동기자회견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평양공동선언서에 서명한 뒤 펼쳐 보이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김 위원장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북과 남이 이룩한 관계 개선의 소중한 결실들을 돌이켜 보았다"라며, "민족적 화해와 평화 번영을 위한 문제들을 흉금을 터놓고 진지하게 논의하였다"라고 말했다. '9.19 군사합의' 채택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적대의 역사를 끝장내기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라고 평가하며 "조선반도를 핵 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즉 주한미군의 핵우산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표현이었지만, 김 위원장 스스로의 말로 비핵화를 약속한 만큼 일정 정도 기대를 품기에는 충분했다.
문 대통령은 민족의 화합에 방점을 찍었다.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우리 겨레의 마음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라며, 동해선-서해선 철도 도로 연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 그리고 이산가족 화상 상봉 및 2032 하계 올림픽 공동개최 노력 등을 언급했다. 적대적 군사활동의 중단과 비핵화 약속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본격적인 남북 교류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한편으로, 문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 답방'을 요청했고 김 위원장이 이를 두고 "가까운 시일 안에" 방문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는데, 이를 듣고 있던 프레스센터의 기자들이 일제히 술렁이기도 했다. 앞선 '평양공동선언' 채택 기념촬영에서 아주 아주 흐릿하게 찍힌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부분을 식별해 냈지만 확실하지 않아 속보를 쏘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2박 3일 방북 일정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남북 정상의 백두산 방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사전에 기상조건 등을 고려해 치밀하게 준비된 행사였지만 철저하게 깜짝 방문으로 연출된 만큼 이를 바라보는 일반 시민에게는 분명 감독적인 한 장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백두산에 오른 양 정상은 천지가 내려다 보이는 장군봉에서 백두산의 절경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에 대해 "천지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북남 간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겠다"라고 말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전날 있었던 '5.1 경기장'에서의 연설을 언급하며 "이번에 제가 오면서 역사를 좀 썼다"라고 화답했다.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김 위원장이 천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자고 제안했고, 본인이 직접 문 대통령 내외와 남측 대표단을 찍어주겠노라 농담을 하기도 했다.
「평양정상회담 사흘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백두산 방문에 동행한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이 김 위원장이 서울을 답방하면 "한라산으로 모셔야겠다"라고 웃으며 말하자,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해병대를 시켜서 한라산 정상에 헬기 패드를 만들게 하겠다"라고 거들었다. 좌중에 웃음꽃이 피어난 장면이었지만, 국가 방위를 책임지는 국방부 장관이 '인민무력의 총사령관'인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며 농담을 던지는 게 과연 웃고만 있을 일인가 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남북 평화라는 정치적 이벤트에 심취해 국가 방위의 지엄함을 잠시 잊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백두산 방문을 끝으로 모든 방북 일정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곧장 DDP 프레스센터를 찾아 '대국민보고'를 가졌다. 백두산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2시간 30분. 판문점이네 평양이네 하며 북한을 오가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아왔지만, 북한이 이토록 가깝다는 사실에는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2박 3일의 강행군이었음에도 문 대통령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감동과 기대와 가득 찬 밝은 얼굴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번 평양 방문에 대해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고 두 정상 간의 신뢰 구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정상회담의 성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 확약과 영변 핵시설 및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의 폐기를 언급했으며, 이와 같은 비핵화 과정의 빠른 진행을 위해 추가적인 '미북정상회담'이 조속하게 개최되길 희망한다는 김 위원장의 뜻 또한 소개했다.
「2박 3일간의 방북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귀환 직후 DDP 프렌스센터에서 가진 대국민보고에서 방북 성과를 밝히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이어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에 대해 "가급적 올해 안에 방문하기로 뜻을 모았다"라며 "우리 국민들이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보고 그의 생각을 육성으로 듣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는 예상대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그 시비를 두고 다시금 정치권을, 학계를, 국민을 반쪽으로 갈라버리는 폭탄이 되었다.
"죄송한 얘기지만, 지난 30~40년간 이뤄진 남북 합의 중에 지켜진 게 거의 없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전직 고위 관료 A 씨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9월 평양공동선언' 합의문에 대해서도 "이제까지 여러 차례 있었던 것들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혹평했다. 과거에도 남북 간에 몇 번이고 합의를 이루어냈지만 "북한이 위반해서 합의들이 다 뒤집어졌다"라고 덧붙였다. 비핵화 표현이 담긴 합의문을 채택한 의도에 대해 묻자 "북한으로써는 핵-미사일을 이미 다 개발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압박을 약화시키고 사실상의 핵 보유국의 지위를 갖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정부 관료로 일하며 남북 관계에 투신해온 A 씨의 허탈함과 비관적 전망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기대하는 목소리 또한 존재했다. "지금 상황에서 남북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이어지는 상황 아래 실질적인 경제 협력을 할 수 없는 만큼, 이번 회담에서는 우선 군사적 충돌 방지와 비핵화를 약속해 평화를 일상화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속 합의서도 만들었고 비핵화를 추동하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상당히 잘 된 것이라고 본다"라고 호평했다. 여태까지의 반복이 되지 않겠느냐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서도, 합의서에 이행 일자를 명기하는 등 디테일한 부분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라며 "어쩌면 이번 합의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 이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또다시 북한의 말솜씨에 속아 넘어가 끝나지 않을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