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하노이미북정상회담
머지않아 열릴 것이라던 '2차 미북정상회담'이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다수의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북정상회담을 개최해 선거 승리에 활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기나긴 기다림을 끝낸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를 통해 "나는 언제든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을 준비가 되어있다"라며 2차 미북정상회담 개최를 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말했는데,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미국이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경고 섞인 조건을 달았다.
김 위원장의 신년사 발표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방미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 부장은 지난해 1월 싱가포르 회담을 앞두고 방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을 갖고 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 북한 양국 정상의 회담 개최 의지 표명에 이어 북한 핵심 간부의 방미, 친서 외교를 거쳐 2차 미북정상회담 준비는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섰다. 마지막 과제였던 회담 날짜와 장소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2월 초 하원 국정연설에서 "김 위원장과 나는 2월 27일과 28일에 베트남에서 만난다"라고 밝힘으로써 모든 준비는 끝나가는 듯했다.
당시 필자의 소속사를 포함해 다수의 기자들은 베트남 남부의 관광도시 '다낭'이 회담 장소로 유력하다고 보고 있었다. 공식 발표에 앞서 회담 장소를 예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호텔의 예약 현황을 취재하는 것이다. 정상회담과 같이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 경우 해당 지역의 호텔 객실이 많게는 수 백 개씩 예약이 잡히곤 한다. 실제로 다낭의 대표적인 몇몇 호텔은 이미 예약이 가득 찼다거나 단체 예약 문의가 들어왔다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나아가 미국이 경호의 용이성을 이유로 다낭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다낭 회담'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2월의 서울을 벗어나 따뜻한 다낭의 해변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해외 출장의 묘미 중 하나인 '남는 시간 관광'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결국 회담 장소는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로 결정됐다. 아주 아주 조금 아쉬웠다.
2월 2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전용열차를 타고 평양을 떠나 베트남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북중 접경지역인 단둥을 지나 텐진, 우한을 거쳐 베트남 북부 동당까지 이어지는, 장장 66시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도중에 중국 난닝시 기차역에 정차하였는데, 김 위원장이 플랫폼에 내려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일본 방송사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애연가로 잘 알려진 김 위원장의 '담배 타임'을 위해 그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양손으로 재떨이를 공손히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신변의 안전을 위해 기차역에 가림막을 설치하는 등 동선을 철저하게 숨겨온 북한과 중국이었으나, 한 순간의 허술함으로 인해 보이지 말아야 할 것, 보이고 싶지 않은 장면을 전 세계에 노출하고야 말았다. 이후 난닝역은 김 위원장의 귀국 동선을 고려해 가림막을 새로 설치했다고 한다.
미북정상회담을 앞둔 하노이는 이전의 싱가포르와 분위기가 유사했다. 노이바이(Noi Bai)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내내 거리 곳곳에서 성조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 주변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다.
27일 저녁,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금 마주 앉았다. 지난 6월 싱가포르 이후 꼬박 8개월 만의 재회였다. 두 사람은 약 30분간의 단독회담과 100분 가까운 친교 만찬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지난 8개월을 회상하며 "어느 때보다도 고민과 노력, 인내가 필요했던 기간이었다"라며 "모든 사람이 반기는 훌륭한 결과가 만들어질 것이라 확신하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만찬에 앞서서도 "우리가 (단독회담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라며 웃음을 보였다. 긍정적인 기대를 품기에 충분했다.
탐색전은 끝이 났고 28일 09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지난하게 끌어온 비핵화 협상의 대단원이 막을 내릴 차례였다. 트럼프-김정은 양 정상은 이날 단독정상회담으로 협상의 포문을 열고 이후 약 70분간의 확대정상회담과 업무 오찬을 예정하고 있었다. 이어 미북 '공동합의문' 서명식과 양국 정상에 의한 '하노이 합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단독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전 세계가 이 순간, 이 장면을 지켜볼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각의 비관적 전망을 의식한 듯, 이번 만남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고 언급하며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왔고 이제는 그것을 보여줄 때가 됐다"라고 덧붙였다. 수십 년간 이어온 비핵화 줄다리기의 끝을 기대하게끔 하는 꽤나 전향적인 발언이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르지 않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옳은 합의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동안 북한에 대한 '압박과 회유'를 반복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전략이 엿보이는 대답이었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현장의 취재기자가 김 위원장을 향해 "확신이 있느냐"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김 위원장은 불쑥 던져진 질문이었음에도 "속단하기는 이르다. 예단하지 않겠지만 직감으로 보면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답했다.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고립되어 있었던 비정상적 독재자 김정은이 외국인 기자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답변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이었다.
단독정상회담과 친교 산책까지 마무리한 두 사람은 곧장 확대정상회담에 돌입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 측에서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과 존 볼턴 NSC 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참석했고, 북한 측에서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이 자리했다. 통상 배석자 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관례이기에 조금은 어색한 그림이었다.
김 위원장은 확대정상회담에 앞서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라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으며 답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아주 좋은 답변"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이후 구체적인 조치 계획이나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지, 미국-평양 간 연락사무소 개설 여부 등 질문이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미디어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이 꺼려졌는지 리용호 외무상이 "기자들을 내보내는 게 어떻겠냐"라고 제안했고, 김 위원장 또한 "1분이라도 귀중하니 충분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취재기자를 물렸다.
확대정상회담 시작 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계를 통해 보인 것은 배석자 모두가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기에, 어쩌면 정말이지 어쩌면 아주 진전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기대마저 갖게 했다.
이른 아침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 일행의 이동을 확인하기 위해 '뻗치기'를 한 탓에 한껏 지쳐있었던 필자는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프레스센터에 마련된 쌀국수 코너에서 첫 끼니를 때우고 베트남 명물인 '트루 밀크'를 마시며 잠시의 여유를 즐겼다.
그런데 업무 오찬이 예정된 12시가 다 되도록 그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필자를 포함해 동료 기자들은 "그동안 들인 시간이 얼만데 설마 판을 깨겠느냐"라며 불안 반 농담 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프레스센터의 기자들은 간식을 먹거나 흡연구역을 오가는 등 새로운 소식이 들어올 때까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확대정상회담 종료 예정 시간을 넘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담 장소인 메트로폴 호텔 입구 인근에서 북한 차량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기자들은 웅성거렸다.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차가 왜 움직여?" 이는 필시 회담이 '결렬'로 끝이 났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악관은 곧장 정상회담 일정이 변경되었음을 즉 회담이 결렬되었음을 기자단에 공지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기자들은 재떨이에 꽁초를 내던지며 헐레벌떡 자리로 돌아왔고 비핵화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속보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14시, 회담 결렬이 공식화된 지 1시간 남짓 지난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숙소인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였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매우 생산적인 시간을 보냈다"라고 하면서도 "합의문에 서명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폼페이오 국무장관 또한 "큰 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다"라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와의 질의응답에서 북한이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상당한 부분의 비핵화 의지가 있었지만 '완전한 제재 완화'를 위한 준비는 안 돼 있었다"라고 답했다. 회담 결렬의 주된 이유가 '비핵화-제재 완화'의 수위 조절에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북한도 할 말은 있었다. 회담장을 떠난 뒤 12시간 가까이 두문불출했던 북한 대표단이 자정을 갓 넘긴 심야에 전 세계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각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와 비밀리에 접촉해 일부 인원을 호텔에 들인 것인데 이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기자회견에서 회담이 결렬로 끝난 것에 대해 "미국 측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제재 완화'를 언급한 것에 반박이라도 하듯 "군수용은 요구하지 않았고, 인민 생활과 경제 발전에 관련된 부분에 대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라고 설명했다.
리용호 외무상 또한 '단계적 해결' 원칙에 따라 "인민 생활에 지장을 주는 제재를 해제하면 영변 핵 시설을 미국 전문가 입회 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한다"라는 현실적인 제안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측이 끝까지 영변 핵 시설 폐기 외에도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며 협상 결렬의 근본 원인은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하노이 회담의 충격적인 결렬 소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비핵화 요구 수준이 굉장히 높았던 게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라며 북한 측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이 높은 수준의 비핵화를 요구하자 북한 또한 '전면적인 제재 해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이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는 것이 홍 실장의 분석이다.
그는 그런 맥락에서 미국-북한 간의 파열음을 가라앉히고 상호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 상황"이라며, 북한과 미국이 가진 의도와 요구 수위를 종합해 "어느 정도 문턱을 낮출 수 있는지 그 여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미북 협상은 사실상 이날로 끝이 났다. 이후 몇 차례 실무자 선에서 소통이 있었으나 미국과 북한 모두 전형적인 탑다운 방식의 의사 결정을 해왔기 때문에 획기적인 진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정착은 이렇게 또 한 발자국 멀어졌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