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by 김코알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019년 5월 3일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기자회견에서 지난 '하노이 회담'이 비록 합의 없이 종료됐지만 "양 정상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도 언제든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덧붙였다.

강 장관은 북한의 핵 포기 의사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 위원장이 하노이를 찾았을 때 확고한 조치를 준비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는 충분하지 않았다"라면서도 이는 "김 위원장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이 결코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강 장관이 SFCC에서 북한 비핵화 의지를 뜨겁게 대변한 바로 다음날인 5월 4일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를 쏘아 올렸고 며칠 지나지 않은 5월 9일에 다시 한번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잇따른 북한의 미사일 도발로 강 장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렇게 남북미 모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대응만 거듭하며 갈팡질팡하던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아름다운" 친서가 도착했음을 밝혔다. 6월 중순 초여름에 날아든 반가운 소식이었다. 북한 또한 관영매체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훌륭한 내용"의 답신이 왔음을 공개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친서 외교'가 재가동됐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6월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미북 정상이 주고받은 편지에 대해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한미간에 긴밀히 소통하며 충분히 브리핑을 받았다"라며 "긍정적인 톤인 것은 맞는다"라고 설명했다. 강 장관은 "(미북) 정상의 (대화) 의지가 여전히 강하다는 걸 표한다"라고 평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모두의 관심은 자연스레 트럼프 대통령의 'DMZ 방문'에 쏠리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1월 첫 방한 당시에도 DMZ 방문을 희망했었는데 날씨 관계로 단념해야 했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DMZ를 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말 G20 정상회의 참석 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한 뒤 서울을 찾아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었다. '친서 외교'로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시기도 장소도 모두 갖춰졌으니 사전에 북한과 치밀하게 협의만 해둔다면 DMZ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를 한다는 게 꿈같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6월 29일 이른 아침. 트럼프 대통령의 파랑새가 흥미로운 소식을 물고 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 메시지를 본다면 DMZ에서 김 위원장과 만나 손을 잡고 인사할 수 있을 것".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담화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라 평가하며 "양국 관계 진전에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art_15617664322846_fa0858.png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6월 29일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웹사이트 갈무리=


이날 저녁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이어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친교 만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 미국의 대북정책 총괄인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가 참석하지 않아 조만간 있을 DMZ 방문을 두고 북한과 최종 실무 조율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날 열린 한미정상확대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라고 밝혔으며, 문재인 대통령 또한 사후 기자회견에서 "정전 선언 이후 66년 만에 판문점에서 북한과 미국이 만난다"라며 '판문점 회동'이 성사되었음을 공식화했다.


기자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판문점에 동행하는 기자들은 그렇다 치고 함께 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취재를 해야 하느냐, 생중계 영상은 들어오느냐,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확인해야 하느냐 등등 한국과 미국 정부에 취재 방식을 타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로이터 TV와 아리랑 TV 등 몇몇 매체의 생중계 영상을 참고해 현장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갈피를 잡았다. 경호로 인해 원거리 촬영이 불가피한 만큼 트럼프-김정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전달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각각 전용 헬기로 판문점으로 향했다. 판문점에 도착한 트럼프 대통령은 JSA 경비대의 경례와 박수를 받으며 자유의집으로 들어갔다. 잠시도 머뭇거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발표만 없었다 뿐이지 이미 당일 오전부터 모든 준비가 완벽히 갖춰진 상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곧장 자유의집 북쪽 문을 나서 군사분계선을 향해 걸어갔다. 반대편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그림이 눈에 스쳤다. 2019년 6월 30일 오후 3시 46분. 트럼프-김정은 두 사람은 남북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눴다. "여기서 한 발자국 건너면 사상 처음으로 우리 땅을 밟는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김 위원장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흔쾌히 북한 땅을 밟았다. 두 사람은 기념촬영을 마치고 남측 자유의집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1280px-Donald_Trump_went_to_North_Korea.jpg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손짓에 군사분계선을 넘는 트럼프 대통령」=위키피디아 영문판=


자유의집 앞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남북미 세 나라의 경호인력과 정부 관계자들이 한 데 섞여있었고 그 틈에서 한 컷이라도 한 마디라도 더 담으려는 기자들의 무언의 기싸움이 이어졌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는 했겠지만,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장에 누구 하나 제정신일 수 없었다.


당시 필자는 중계 화면으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뒤섞여 시끄러운 가운데 얼핏 "방북... 평양..."이라 말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직감적으로 '이건 우리가 단독으로 쓸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계 화면을 녹음 해두길 정말 잘했다. 해당 구간을 몇 번이고 돌리고 또 돌려서 김 위원장의 한 마디를 식별해 낼 수 있었다. "한번 방북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에 온다면 세계 정치 외교사에 거대한 사변이 될 것이다". 전 세계 모두가 지켜보는 공개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곧장 속보를 쳤다. 이를 본 타사 기자들에게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들은 거냐, 시간대가 언제냐, 이걸 어떻게 알아들었냐... 연락이 쏟아졌다. 모두가 공유하는 현장, 영상, 자료의 틈에서 우리만의 기삿거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정말 짜릿한 경험이다.


'세계사적 사변'이 된 판문점 정상회동은 1시간여 만에 끝이 났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오산 공군기지를 방문해 주한미군 장병들에게 연설했다. 거대한 성조기 앞에 전투기를 떡하니 두고 AC/DC의 록 음악에 맞춰 등장하는 장면은 미국 그 자체였다. 마치 WWE 스타 레슬러의 등장과 같았다. 연설 내내 본인의 치적을 장황하게 자랑하고, 장병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애국심을 이끌어내는, 그만의 철저한 쇼맨십에 여러 가지 의미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이란 그저 정치적 도구일 뿐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또한 대북제재를 풀고 마음 편히 먹고살기 위해 미국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날과 같이 그 어떠한 성과도 없는 '쑈'가 성립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비핵화도 평화 구축도 없다. 그저 각자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악수하고 손뼉 치고 우당탕탕 일을 벌일 뿐이다.


그 틈에 눈치 없이 끼어서 한반도 평화의 '운전자'랍시고 힘차게 기사 노릇이나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 앞에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납작 엎드려 비위나 살살 맞추며 모든 준비를 떠맡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소외당한다. 판문점 정상회동은 우리 정부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저 미국과 북한이 하고 싶어 하니 그렇게 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는 꿈나라 이야기가 됐다. 남북 교류의 획기적인 변화도 발전도 찾아볼 수 없다. 초라하게 끊어져버린 짝사랑 핫라인과 처참하게 무너져 가루가 되어버린 개성 '남북공동련락사무소'만 남았다. 평창 올림픽에서 손잡고 외쳤던 민족의 화합과 평화는 온 데 간 데 없고 "미상 발사체" 발사 소식만 요란하다. 참으로 공허하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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