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35차례 강조... 화합과 소통은 부재
오늘 오전 11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특설무대에서 성대하게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의 5년 임기가 막을 올렸다. 윤 대통령은 국내외 귀빈과 일반 국민 등 41,000여 명을 초청한 가운데 취임사를 통해 35차례에 걸쳐 '자유'를 논했다.
◎ 이날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 △과학과 진실에 근거한 지성주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국제사회 연대 등 세 가지 가치를 품고 있었다. 약 16분간 이어진 취임사에는 자유가 35회 등장해 주요 단어 중 빈도가 가장 높았고, 이어서 시민 15회, 국민 15회, 세계 13회, 평화 12회, 국제 9회, 민주주의 8회, 위기 8회, 연대 6회 등 순이었다. 선거기간부터 '자유롭고 공정하고 상식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며 줄곧 주장해온 윤 대통령의 근간 이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권위주의 팽창 등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세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자유'를 35차례 언급한 것은 북한·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세력과의 '탈동조화(Decoupling)' 기조를 강력히 시사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 서두에서 국민과 재외동포에 이어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을 지적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제사회 주류와 연대할 것임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한편으로 펜데믹, 국제교역질서의 변화 및 공급망 재편, 기후·식량·에너지 위기 등 범지구적 규모의 도전 과제를 언급하며, 이 모든 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했다. 이에 맞서 국가와 국민 나아가 전 세계가 하나 되어 극복하기 위하여는 단 하나 바로 '자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연설에서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재발견'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정치적 권리의 자유와 자유시장경제 등 자유의 기본적 가치를 숭상하면 번영과 풍요 그리고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고 설파했다.
나아가 전 세계 자유 시민의 존엄한 삶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모든 세계의 자유 시민이 연대하여 도와야 한다고 언급한 부분에서는 '북중러'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세력, 전근대적 반인권 전제정치 세력에 대한 집단적 대응 의사를 내비쳤다.
윤 대통령은 '자유'를 누리는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하여는 △경제적 기초 △공정한 교육 △문화 접근 기회의 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선거기간에 불거진 "극빈층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망언 논란을 의식한 것처럼 보였다.
◎ 대북관계는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 그쳤다. 윤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취약한 평화가 아니라, 자유와 번영을 꽃피우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추구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지난 5년간 굴종적인 자세로 북한 김정은에게 끌려다녔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전쟁이 두려워 살살 회피하며 낯빛만 살폈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이성적이고 건전한 관계에서의 비핵화를 추동하겠다는 다짐이다.
윤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하여 "대화의 문"을 열어두겠다는 기존의 방침도 재차 확인했다. 그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할 경우 북한 경제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명박 정부 당시 제기된 이른바 '비핵·개방·3000 구상'의 답습으로 보인다.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고 개방경제를 채택할 경우 북한 주민의 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려주겠다는 '비핵·개방·3000 구상'의 연장선을 탄 것은 아무래도 이번 윤석열 정부의 대북 브레인이 모두 'MB맨'으로 채워진 때문으로 보인다.
당초 국방력 강화와 북핵 억지력 제고, 방어적 선제타격 등 대북 강경 메시지를 발신하는 게 아니냐는 전망 또한 있었으나, 최근 고조되고 있는 북한의 도발 수위와 핵 실험 재개 우려 등을 감안하여 강경한 언사는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결국면에서 탈피한 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과 한미정상회담 등 협력과 공조를 거쳐 대북정책의 선명성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 국내 부문 역시 뚜렷한 비전은 읽을 수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현재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을 발목 잡고 있다"라고 진단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 각계각층의 반목은 장기간에 걸친 저성장과 부동산 폭등, 경기 하강 등에 그 원인이 있음을 지적하며 '도약과 빠른 성장'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5년간 사회 문제의 '책임자' 혹은 '나쁜 놈'을 찾아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이와 달리 오늘 윤 대통령이 보여준 인식은 "나눠 먹을 파이가 줄어드니 서로를 물고 뜯는다, 파이를 획기적으로 키우자"와 같은 세간의 절절한 분석에 귀 기울인 모습이다.
한편으로 윤 대통령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발생하고 있는 온갖 문제는 바로 편 가르기와 가짜 뉴스가 판치는 '반지성주의' 세태에 기인한다고 꼬집었다. 반지성주의의 사례로써 △진실의 왜곡 △사실의 취사선택 △다수의 힘에 의한 억압 등을 거론하였는데, 이는 지난 5년간 문재인 정부 아래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세력이 자행한 행태를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해석된다.
◎ 윤석열 대통령은 끝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위상에 걸맞게 자유와 인권, 보편적 국제규범을 지지하고 수호하겠다는 대찬 포부를 밝혔다.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하여 기존의 선진국이 일부 후퇴함에 따라 상대적 위상이 올라간 대한민국을 '실질적인 선진국'으로 만들고 글로벌 리더 국가로 공고히 하겠다는 생각이다. 이는 국내 문제에 매몰되는 '우물'에서 벗어나 국제 문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것인데 이정표만 따라가는 '운전자'가 아닌 명실상부한 '국제질서 설계자'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나아가 윤 대통령은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여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고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에 따라 블록화 재편 중인 전 세계 흐름에서 '자유세계 1티어 국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포부로 읽힌다.
◎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글로벌 리더 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포부를 '자유'의 가치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다만 문재인 정부 내내 지적되었던 '편 가르기'와 만연한 '혐오·갈등'의 사회 풍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제시되지 못했다. "먹고 살만 하면 안 싸운다"는 기조 아래 과학 기술과 혁신, 경제성장 등 포괄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였으나 자못 아쉬웠다.
한편으로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되어야 할 대통령의 취임사임에도 '소통', '화합', '협치' 등의 단어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은 의아하다. 연설의 흐름에 따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피한 느낌'이 든다. 소통과 화합 대신 '반지성주의'를 넣어 불필요한 갈등을 재생산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 모든 한계점은 '자유'를 강조하는 데 시간을 과도하게 할애하여 정작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녹여내지 못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북한 비핵화와 강대강 대결국면 해결을 위한 '튼튼한 국방력 강화'와 같은 전통적인 보수의 레토릭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수치로 상상하기 어려운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표현이 다수였다.
오늘부터 당장 윤석열 대통령 시대, 용산 시대가 열린다. 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이자 권력의 대명사였던 청와대에서 벗어나 국민의 눈높이로, 시민의 터전으로 스며든 대한민국 역사상 첫 번째 대통령이다. 대통령집무실 이전으로 국민적 관심이 높은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다. '청와대 이전' 공약을 공염불로 날려버린 역대 그 어느 대통령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다 구체적이고 수치화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하여, 대통령과 국민 모두가 함께 정의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꿈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5년,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