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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May 06. 2020

1. 둘이서 라면 하나 - 신라면

신라면


평일 밤 11시.

남편이 식탁에 앉아 호로록 신라면을 먹고 있다. 평소라면 둘 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의 직업은 쉽게 말하면 프로그래머이다. 한 회사에서 전산팀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 업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퇴근이고 뭐고 당장 처리를 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오늘도 퇴근시간 무렵 뭔가 사건이 발생했고 남편은 금방 끝날 줄 알고 밥도 먹지 않고 일을 했다는데 결국 10시가 넘어 끝이 났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는 남편을 보며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나도 너 기다리다 지쳤거든요).


“배고프지? 라면 끓여줄까?”

 


 라면은 이럴 때 먹는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러 가기 전에 먹는 라면의 맛, 비바람이 치는 오후 창밖을 바라보며 먹는 라면의 맛, 열대야로 잠 못 이룰 때 에어컨을 틀어놓고 먹는 라면의 맛, 봄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몇 시간을 달린 후 먹는 라면의 맛. 라면은 한 끼 식사로 먹을 때보다 든든한 간식으로 먹을 때 더 맛있다.


 농심에서 나온 신라면 하나를 스테인리스 냄비에 넣고 끓인다. 조리법에는 4분 30초를 끓이라고 되어 있으나 둘 다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기에 그전에 불을 끈다. 이미 한 번 튀겨진 면이니 덜 익혀도 상관없다. 라면 표지를 살펴보니 활활 타오르는 내 마음처럼 붉은색이 주를 이룬다. 좌측 우편에는 한자로 매울 신 자가 크게 적혀 있다. 중학교 때 한자 시험은 아무리 공부해도 80점을 넘지 못했지만 신라면 덕분에 매울 신자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나트륨은 1,790mg이 들어있는데 1일 섭취량의 90%라고 적혀 있다. 라면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비난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트륨 섭취를 줄여 보겠다고 라면 스프를 적게 넣는다면 차라리 안 먹는 게 낫다.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매콤한 향기가 좋다. 남편은 가뿐히 면발을 집어 먹는다. 어쩜 그리 젓가락질도 잘하는지. 딱 한입만 먹어보려고 젓가락을 슬쩍 갖다 대려는데 남편이 말한다.


“이럴 거면 하나 더 끓이지 그랬니?”

“아니야. 나 저녁 먹었어. 그냥 맛만 보려고.”


누군가 라면을 먹을 때면 주변에서 흔히 하는 거짓말이다. 라면을 딱 한 젓가락만 먹을 수는 없다. 다 뺏어 먹거나 아니면 먹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하나 물으며 남편이 질문에 답을 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얼른 라면을 뺏어 먹는다.

 머리를 맞대고 라면 하나를 나눠먹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라면에 관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을 한다. 자기가 라면 그림을 그릴 테니 나보고 그에 맞는 글을 쓰라는 것이다. 집에서 라면을 거의 끓여주지 않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종종 먹어 보려는 남편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 그림이야 보이는 대로 그리면 되지만 라면에 관한 글은 대체 뭘 써야 할까?

 


 한국에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1963년이다. 삼양식품이 정부의 지원과 일본 묘조식품에서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을 생산하였다. 우리 아빠가 1952년생이니 11살 전까지는 라면이라는 게 뭔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갑자기 아빠에게 최고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라면은 오랜 시간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어 왔다. 김훈은 <라면을 끓이며> 라는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먹어왔다. 거리에서 싸고 간단히,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다. 그 맛들은 내 정서의 밑바닥에 인 박혀 있다.’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음식을 고르라면 라면이 가장 만만하다. 김밥도 생각나지만 김밥은 입을 크게 벌려야 하기 때문에 라면이 나은 것 같다. 혼자 먹는 라면은 쓸쓸해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라면의 맛을 음미하느라 고독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반세기 만에 한국을 지배한 라면의 위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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