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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우선순위

by 유자와 모과
한정식 청목.jpg


부모님과 점심을 먹는데 엄마가 말했다.


“금요일에 아빠 혼자 지하철 타고 평택 놀러갔다 온단다.”

“거길 왜 가는데요? 가서 뭐하게요?”

“그냥 점심 먹고 뭐 있나 구경하고 오는 거지.”

“왜 혼자 가요. 저랑 같이 가면 되죠.”

“너 글 쓰고 운동하느라 바쁠텐데.”


엄마는 집순이다. 외식도 싫어하고 여행도 싫어한다.

아빠는 집돌이인 동시에 외식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한다.

작년에는 엄마 손목이 부러져 부모님과 여행을 몇 번 못 갔다.

아무래도 아빠의 콧바람을 뚫어줄 때가 왔나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스티븐 코비는 해야 할 일을 네 가지로 분류하라고 권한다.

급하고 중요한 일,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자신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과 둘째,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약속일지라도 항상 그것을 실천한다면 자기 통제의 장점을 깨닫게 하는 내적인 성실성을 갖추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우선순위를 정해놓으면 일상에서 큰 고민 없이 삶을 통제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삶에서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은 글쓰기와 운동이다.

급하지 않기에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 뒤로 밀리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쓴다.

온갖 집안일, 장보기, 약속은 점심 이후로 미룬다.

운동은 글쓰기보다 덜 중요하기에 간혹 오후에 약속이 생기면 빼먹기도 한다.

마음의 갈등이 생길 때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치고 들어올 때다.

내게 그건 부모님이나 교회에 관련된 일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이나 나들이를 갈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기에 글을 쓸 시간이 없다.

교회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손목을 다친 엄마를 모시고 아침 일찍부터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종종 있었다.

글을 써야 할 시간에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짜증이 났다.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에게, 동생에게, 아빠에게 툴툴댔다.

몇 달을 불편한 마음으로 병원을 오가다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보다 글쓰는 게 더 중요할까?

주일학교 교사 역할을 감당하는 것보다 글쓰는 게 더 중요할까?

아니다.

그동안 내 삶에서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았기에 마음에 갈등이 생긴 거였다.

아빠는 아침에 내가 글을 쓰고 오후에 운동하는 루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기에 혼자 나들이를 가려 했다.

하지만 아빠, 제겐 글쓰기보다 아빠가 더 중요해요.


엄마를 설득해 셋이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장소는 경기도 이천.

이천 쌀밥을 먹고 설봉 공원을 산책한 후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일정으로 계획을 세웠다.

참고로, 우리 부모님과 달리 시부모님은 여행의 달인이다.

두 분 다 운전도 잘하시고 오랫동안 대전에 사셨기에 친구도 많다.

날만 좋으면 여기저기 다니시느라 바쁘다.

몇 년 전까지 여름 휴가를 가겠다며 2인용 텐트를 트렁크에 싣고 남해로 내려가 차를 세워두고 코펠에 라면을 끓여 드셨던 분들이다.

시부모님은 알아서? 잘 다니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아침에 차를 몰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나는 맛집이나 핫 플레이스를 검색한 후 언제든 다녀올 수 있지만, 부모님은 어디가 좋은지도 모르고 더 이상 운전도 하지 않으시니 나와 함께 하는 나들이가 좋을거다.


유명하다는 이천 쌀밥 집은 여럿 가봤지만 내 입맛에는 강민주의 들밥이 제일 낫다.

하지만 평일에도 대기가 많고 번잡하기에 공간이 넓고 깔끔한 청목으로 간다.

부모님은 좋아하시니 다행이다.

아빠는 국이 맛있다고 하신다(아니 그 많은 반찬 다 놔두고).

생선 조림도 맛있게 드신다.

엄마는 뭐든 잘 드시니 물어볼 필요가 없다.


다음 코스는 설봉공원.

부모님과 나들이나 여행을 떠날 때는 내가 전에 방문했던 장소들 중에서 계획을 세운다.

화장실은 잘 갖춰져 있는지, 산책길이 험하지 않는지, 음식이 너무 맵거나 달지 않는지, 소음이 심하지 않는지, 벤치가 여기저기 놓여 있는지, 나무와 꽃이 많은지, 관심을 가질 건축물이나 박물관이 있는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꽤 있다.

부모님은 내게 관광 가이드를 하면 잘 할 거라고 말씀하신다.

시니어 전문 국내 여행 가이드라면 자신 있다.


설봉공원은 봄 가을에 오면 참 좋은 곳이다.

이천시립박물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설봉국제조각공원이 한 곳에 모여 있다.

넓은 잔디밭을 느긋하게 산책해도 좋다.

우리는 저수지만 두 바퀴 걷는다.

오리 몇 마리가 살얼음이 낀 호수 위에 사뿐히 앉아 있다.


카페로 이동.

부모님과 함께 카페에 갈 때 고려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푹신한 의자와 조용한 분위기.

여여로는 공간은 아름답지만 부모님이 앉기엔 의자가 불편해서 탈락.

이진상회는 야외가 넓고 아름다운데 지금은 겨울이라 탈락.


한옥 느낌의 호야로 간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 답답하지 않다.

호기심 많은 아빠는 이천 쌀 라떼와 이천쌀 쑥 케이크를 시킨다.

엄마는 자몽티, 나는 아메리카노.

엄마는 끊임없이 얘기하고 아빠는 가만히 들으며 먹는데 집중한다.

카페  고양이.jpg


흰 고양이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카페를 돌아다닌다.

귀엽긴 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털이 음료에 들어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든다.


집에 갈 시간.

부모님 집에 도착하니 4시가 다 되어간다.

아빠는 ‘잘 놀다 와서 만족’ 표정이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따라간 거야’ 표정이다.

나는 ‘미션 완수해서 안도’ 표정이다.


다음 주엔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수원 스타필드 트레이더스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전체 오픈은 1월 26일이다.

아빠의 ‘새로운 곳이라 만족’ 표정을 기대해본다.


카페호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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