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독서다

by 유자와 모과

여행을 떠날 땐 미리 읽을거리를 챙긴다.

일주일 이상 여행을 떠날 경우에는 다 읽은 후 버리고 와도 될 신문과 잡지 위주로 챙긴다.

나머지는 여행지에서 들린 서점에서 영어 원서를 사 본다.

일주일 미만의 짧은 여행일 경우는 책 한 두 권만 챙겨도 충분하다.


여행지에서는 자기 전 책을 읽을 때 집중도가 가장 높다.

샤워를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는다.

무사히 하루 일정을 마쳤고 내일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몸은 나른하지만 기분은 좋다. 청소나 요리 같은 일들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밤새도록 책을 읽어볼까? 금세 책 안으로 빠져든다.

고개를 들면 모과는 침대위에 대(大)자로 뻗어 자고 있다.

자정이 되어 간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내일이 있으니까.


여행지에서 읽었다고 해서 특별히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은 없다.

책마다 가진 아름다움이 비등비등하다.

아니다. 정확히 기억나는 책이 한 권 있다.

에거서 크리스티의 책이다.


광저우를 경유하여 시드니로 가야 할 때 일이다.

광저우 공항 입국 심사가 까다로워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후기를 보았기에 환승 시간이 넉넉한 표를 예매했다.

예상과 달리 사람도 없고 심사도 금방 끝나 공항 내에서 5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구경이나 하려 했는데 공항 2터미널이 동네 마트 수준이었다.

대만식 디저트 가게에서 망고 빙수를 먹고 한 바퀴를 천천히 둘러봤는데도 4시간이 남았다.


하나뿐이던 서점에 들어갔다.

공항 서점은 대개 규모가 작고 책 종류도 적다. 읽을 만한 책을 찾아 보지만 끌리는 책이 없다.

영문으로 읽어야 하니 어렵지 않은 책으로 골라야 한다는 한계도 있다.

포도(grape)와 자몽(grape fruit)도 헷갈리는 판국이라 잘못 골랐다가는 몇 장 읽은 후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발견한 책이 <And Then There Were None)>(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이다.

책도 얇고 문장도 간결하다. 크리스티 추리소설이니 당연히 재밌겠지.

87 위안을 내고 책을 산 후 공항 내 카페 코스타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이렇다.

어떤 부자가 ‘인디언 섬’이라 불리는 땅을 산다.

부자는 여덟 명의 남녀를 각각의 사연으로 초대한다.

손님들이 하나 둘 섬에 도착한다.

섬에는 부자에게 고용된 하인 부부 두 명 밖에 없다.

하인들은 주인이 사정이 생겨 좀 늦어지니 손님을 접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상한 건 섬에 있는 열 명의 남녀 모두 주인을 알거나 만나본 사람이 없다는 거다.

손님도 편지로 초청받았고 하인도 편지로 고용되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허공에서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열 사람이 각각 과거에 저지른 범죄를 열거하는 내용이다.

모두 법으로 심판받지 않은 범죄들이다.

손님과 하인은 두려움에 떨며 섬을 떠나려 한다.

폭풍우 때문에 아무도 섬을 벗어날 수 없다.

응접실에는 열 개의 인디언 소년 인형들이 놓여 있는데 한 명이 죽을 때마다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고립된 장소에 과거에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누군가 차례로 그들을 살해한다는 설정이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고?

빙고! 크리스티가 1939년에 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원조다.

그 후에 나오는 작품들은 이 책의 오마주라고 보면 된다.


과연, 시간과 공간을 잊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한 명씩 사라질 때마다 범인이 누군지 알고 싶어 초조해졌다.

나는 소설을 중간쯤 읽고 나면 결말 부분을 펼치고 어떻게 끝나는지 미리 읽어 버린다.

모과는 내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도저히 결말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다.

결말을 알지 못한 채 밥을 먹거나 잠들기 어렵다.


추리소설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결말을 미리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읽는 내내 불안하고 조급해져 책장을 막 넘기게 된다.

결말을 확인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읽던 데로 돌아가 나머지 부분을 천천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영어로 쓰여졌다.

중간쯤 읽다 결말을 펼쳐 보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 포기하고 다시 읽던 부분으로 돌아갔다.


급한 마음에 범인을 추리하는데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장면은 건너뛰었다.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죽고, 아홉 명이 죽고, 드디어 마지막 사람이 죽었다.

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살해되었다.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자기야, 책을 다 읽었는데도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어.”


모과는 이제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비행기 안에서 다시 읽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영어 해석이 안 되어 어디선가 중요한 단서를 놓친 게 분명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있나.

한명씩 살해당하는 부분으로 돌아가 천천히 다시 읽을 수밖에. 그제야 간신히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번이나 읽은 덕분에 책 내용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챙겨야 할까?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8화도둑님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