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 장욱진
명절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과 궁을 무료 개방한다.
오랜만에 미술관 나들이를 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는 장욱진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10년 전 양주에 장욱진 미술관이 생겼을 때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미술관은 아름다웠지만 작품이 적었다.
멀리까지 왔는데 아쉬웠다.
그때 기억이 있어 이번 전시회도 기대하지 않았다.
덕수궁 걸을 겸 가보는 거지.
웬걸.
전시실 4곳이 작품으로 가득 찼다.
이게 다 어디서 왔대?
처음 보는 작품도 많았다.
이게 다 어디 있었대?
아. 이건희 컬렉션.
작년에 이중섭 특별전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작품을 보며 즐거웠다.
삼성가에서 기증하지 않았다면 그런 그림들이 있는 줄도 몰랐겠지.
감사하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마음이 끌린 그림도 이건희 컬렉션이다.
나룻배가 푸른 강 위에 떠 있는 작품이다.
선착장을 막 떠났거나 도착하려는 참인지 사람들이 배 안에 서 있다.
자전거와 소 한 마리도 같이 실렸다.
사진을 찍듯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남자 학생 한명이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남자아이 둘은 형제 사이일까?
여자 머리 위에 얹힌 봇짐 안에는 뭐가 담겼을까?
또 다른 여자가 품에 안은 건 닭일까?
소는 어디로 가는 걸까?
6·25전쟁 중 고향인 충남 연기군에 잠시 피신해 있을 때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들여다볼수록 웃음이 난다.
그림 구경을 실컷 하니 기분 좋다.
이제 현대미술관으로 이동.
쉐이크쉑버거에 들려 아이스크림이 퐁당 빠진 루트비어를 한잔 마시기로 한다.
키오스크에 ‘플로팅 루트비어’ 메뉴가 없어 한참 헤맸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그건 주류라 카운터에서만 주문 가능하단다.
아니 이건 무알콜이잖아요.
그럼 진저에일은요.
검색해보니 술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라 한국에서는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루트비어는 식물 뿌리(root)나 열매 과즙에서 추출한 향유를 탄산수, 액상과당과 섞은 것이다.
파스 맛이 난다.
쉐이크쉑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미국에서 처음 맛본 루트비어는 환상적이었다.
닥터 페퍼 잘가라.
처음의 감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솔티카라멜 쉐이크’만큼 맛있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서울 현대미술관에도 사람이 많다.
미술관 관람객들이 눈에 띈다.
덕수궁 미술관은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현대미술관은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작품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이건 뭐지? 이런 거 나도 하겠네. 이게 작품이야? 장난하나? 저걸 비엔날레에 출품했다고?
남편은 ‘현대’ 미술관에 올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도 같은 심정일 때가 많다.
우리는 서로 속삭이며 작품 흉을 보면서도 전시가 바뀔 때마다 미술관을 찾는다.
낯섦을 느끼고 싶어서다.
무심하게 미술관을 산책하다 놀라운 작품과 마주쳤다.
규모가 압도적이다.
거대한 작품은 관객의 시선을 끈다.
재료가 뭐지?
가까이서 보니 플라스틱 같다. 남편은 달고나 색깔이라며 설탕이라고 추측한다.
남편 말이 맞았다.
설탕? 어떻게 보존처리했대?
12미터 높이의 벽면 설치 작품 <날의 벽>이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 전시의 일부다.
정연두 작가는 세계 각국의 농기구를 오브제로 만들어 쌓아 올렸다.
거대한 벽과 설탕. 무슨 의미일까.
거대한 벽은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서 착안했다.
전 세계로 흩어져야만 했던 유대인 역사를 가져와 디아스포라 의미와 접속시켰다.
설탕은 디아스포라를 촉발시킨 근본 원인이다.
타국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되게 살던 농민들.
설탕 생산을 위한 농사짓기는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내가 설탕을 음식 재료로만 여기는 동안 작가는 디아스포라까지 생각을 뻗어나갔다.
작품을 완성하는데 설탕이 몇 포대 들어갔는지 궁금하다.
농기구 만들면서 부서진 것들은 먹기도 했겠지?
설탕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았을까?
이 맛에 미술관 간다.
혀를 차고 감탄하고 상상할 수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과 가장 이상한 작품 고르기 게임도 할 수 있다.
작품 100개를 5분 만에 볼 수도 있고 작품 하나를 5분 동안 볼 수도 있다.
구석자리에 앉아 명상하는 척 하며 딴생각을 할 수도 있다.
길을 걷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마주치면 들어가 보자.
입장료가 비싸면 그냥 나오면 된다.
무료라면 몸도 풀 겸 한 바퀴 둘러보라.
마음을 쿵 때리는 작품을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다시 가던 길 가자.
<날의벽> 정연두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 곳에 몰아 세워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 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 장욱진 <새벽의 세계>(샘터)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