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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아이 손을 잡으면 세상이 느려진다

by 유자와 모과
서울어린이대공원.jpg


시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셨다.

남편 남동생 가족도 모였다.

다함께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갔다.

나를 큰엄마라 부르는 조카 윤호 손을 잡고 걸었다.


윤호는 다섯 살 남자아이다.

노란 떡뽁이 코트를 입은 윤호는 병아리 같았다.

윤호는 길을 걷다 가끔 커피 자동차라고 소리쳤다.

“윤호야. 커피 자동차라고? 자동차가 커피 마시니?”

“커피가 앙~ 자동차 먹어.”

“자동차를 먹었다고?”


알고보니 커비 자동차였다.

커비는 닌텐도 액션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이다.

찐빵같이 생긴 얼굴에 손과 발이 달린 피규어다.

온 몸이 분홍색이다.

커비가 자동차 위에 커버처럼 내려앉은 것이(이 세계에서는 머금었다고 표현한다) 커비 자동차다.

작년에 CU에서 커비 피규어 껌을 팔기도 했다(껌은 한 개 들었다).


옛날에 '푸푸푸랜드'라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디디디산'에서 먹보 '디디디 대왕'과 그 부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음식을 몽땅 가져갔다.

하늘을 나는 비보 '반짝반짝 별'도 가져갔다.

국민들은 슬픔에 빠졌다. 배도 고팠다.

여행을 하던 한 젊은이가 푸푸푸랜드를 지나가다 소식을 들었다.

그는 푸푸푸랜드의 음식을 모두 되찾아 오겠다며 용감하게 디디디산을 향해 떠났다.

모두의 배를 채우기 위해 떠난 정의의 용사, 바로 ‘커비’다.


스토리를 듣고 보니 커비 멋진걸.

나도 하나 갖고 싶다.


커피 자동차를 외치는 조카와 대공원 입구에서 100미터를 가는 데도 한참이다.

아이는 결코 직선으로 걷지 않는다.

연못도 봐야하고 놀이터도 들려야 한다.

동물원이 있는 입구까지 40분이 걸린다.


옆에는 남편이 조카 세빈이와 끝말잇기를 하며 걷고 있다.

세빈이는 8살 여자아이다.

끝말잇기는 뫼비우스 띠처럼 뱅글뱅글 돌고 있다.

식당 갈 때부터 시작했으니 2시간째다.

남편은 지겹지도 않는지 침착하게 단어를 고르고 있다.

듣는 내가 지겹다.

세빈아. 끝말잇기 말고 다른 거 하면 어때?

잠시 생각하던 조카는 스무고개를 하겠다고 한다.

남편과 세빈이는 스무고개에 빠져 그들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동물원에 도착한다.

아직 겨울이라 실내에 머무르는 동물이 많다.

맹수존에 들어섰다.

입구 근처에 아이들이 앉을 수 있는 자동차 모형이 있었다.

이런.

윤호 자동차 좋아하는데.

조카 발걸음이 딱 멈췄다.


자동차 의자에 앉은 윤호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른들이 맹수존을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때까지 윤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껍데기만 자동차 모형 일뿐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있는 건데.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가 좋다고 홀딱 빠진 걸까?


기다릴만큼 기다린 어른들은 윤호를 간신히 의자에서 떼어놓았고 아이는 통곡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과 세빈이는 스무고개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대로 출구까지 무사히 통과하나 싶었는데 윤호가 놀이터에 있는 뺑뺑이(회전무대)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심쿵.


윤호는 뺑뺑이를 200번쯤 타고 모래를 200번쯤 쌓았다.

세빈이는 고정 자전거를 100번쯤 타고 모래를 100번쯤 쌓았다.

모든 게 끝났다.

출구가 저 앞에 보인다.

저 문만 통과하면 끝이다.

세빈이가 남편 곁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큰아빠. 우리 스무고개 어디까지 했죠?

놀이를 할 때 어린아이는 대상으로 부터 떨어져 관조하지 않고, 대상을 손에 쥔 채 미메시스적으로 대상의 일부가 된다.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커비자동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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