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40일 특별 기도회 첫날,
600명이 앉을 수 있는 예배당 좌석이 꽉 찼다.
지각했다면 본당에 못 앉을 뻔했다.
이렇게 성도가 많이 올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선뜻 도전하기 힘든 미션이다.
우리 반 아이들도 몇 명 보인다(너희들 무섭게 왜 이래).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막 잠에서 깨어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엄청 왔어. 이 새벽에. 다들 엄청나. 앞쪽 귀퉁이 자리에 간신히 앉았잖아. 늦게 가면 앞자리 못 앉을 것 같은데. 어쩌지.”
“며칠만 지나면 앞으로 갈 수 있을거야.”
그래. 뭐든지 작심삼일이니까. 곧 떨어져나가겠지.
착각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이 주가 지나도 인원이 줄지 않는다.
온라인 예배 인원까지 합치면 매일 새벽마다 천 명이 넘는 성도가 깨어 있다.
10분은 일찍 와야 앞에서 7번째 좌석 귀퉁이에 겨우 앉을 수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새벽마다 성도들을 보며 감동한다.
그들의 열심, 진지함, 소망이 깃든 얼굴을 보며 은혜 받는다.
그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들이 응답되기를 기도한다.
살면서 한 번도 새벽기도를 성실히 하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에 40일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픈 성도, 가족, 친구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30일이 지나자 체력이 조금씩 바닥나기 시작했다.
쉽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지와 다르게 몸이 피곤을 느낀다.
36일 째 되던 날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 쌍커플이 세 겹이 됐어. 무슨 일 있니?”
친구 말은 사실이었다.
쌍커플이 세 겹이 되어 눈매가 그윽해 보인다.
왠지 더 예뻐 보이네.
기력 소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40일 기도회가 끝났다.
마지막 날은 토요일이었다.
예배가 끝난 후 성도들과 다 함께 교회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전 7시.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다.
여행으로 3번 빠졌다.
그리고 부활절 주일 새벽이 왔다.
41일째 새벽예배다.
부활절 주일 새벽 기도회 때 받은 노란 스티커(패자 부활전 스티커)로 결석한 공간 중 한 곳을 채워 넣었다.
교회에서는 40일 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 이름으로 장애 아이가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세 가정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지역 독거노인 50분에게 후원을 하기로 했다.
긴 여정이었다.
함께 기도하는 이들이 있어 새벽마다 기쁘고 즐거웠다.
체력적으로는 지쳤지만 마음은 더 튼튼해졌다.
새벽기도를 하며 이 순간 살아 있음이 은혜요 감사라는 걸 매번 느꼈다.
‘당신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
매일 이러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기도 속에서 말은 저절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기도란 애초부터 침묵의 영역 안에 있었다. 기도는 인간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신에게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 안에서 사라진다. 기도는 그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지만, 기도의 말은 항시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기도는 말들을 침묵 속으로 쏟아 붓는다.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