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후 남편이 진라면 순한맛을 그리더니 배도 출출하니 끓여먹자고 한다. 신라면을 먹은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라면을 먹자고? 남편의 건강이 걱정된 나는 물 대신 채수(각종 야채를 우린 물)를 붓고 진라면 스프 대신 우리밀 감자 스프(라면 스프를 잘 먹지 않아 모아놓은 것)를 넣어 끓여 주었다. 거기에 영양소를 생각한다고 애호박, 양파, 청양고추, 느타리 버섯까지 넣었더니 진라면 고유의 고소한 맛이 사라진 것이다. 남편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라면을 먹는다. 한 입 먹어보았더니, 음... 앞으로는 건강이고 뭐고 있는 그대로의 라면을 끓여 먹기로 남편과 약속했다.
진라면은 오뚜기에서 만들었다. 진라면 표지는 화사한 샛노란 색이다. 호안미로의 그림을 갖다 쓴 것인데 남편 그림엔 안보이지만 오른쪽 상단에 Special Edition이라고 적혀 있다(귀찮다고 안 그렸단다). 와. 나도 스페셜 에디션 상품을 가져보는구나. 그게 진라면 30주년 한정판이 될 줄은 몰랐지만. 호안미로(Joan Miro)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예술가이다. 여기서 잠깐. 스페인어의 알파벳 J는 H발음이 나기 때문에 조안미로가 아닌 호안미로로 불러야 한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몬주익 언덕 중턱에는 언뜻 보면 하얀 식빵처럼 생긴 호안미로 미술관이 있다. 예전에 우리도 몬주익 언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미술관 앞까지 가긴 했다. 하지만 주변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버스킹 공연을 보고 야외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다보니 날이 저물었다. 그때 미술관에 들어갔다면 이 글이 더 풍부해졌을 텐데 아쉽다.
호안미로의 그림은 강렬하면서도 경쾌하다. 미로는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만을 사용하여 단순하게 그리는 걸 선호했다. 그의 그림엔 추상적인 상징과 기호가 가득하다. 팝콘이 톡톡 터지는 것처럼 캔버스에 음표와 새와 눈과 해와 달이 춤춘다.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자랐으니 화풍이 그럴 만도 하다. 미로의 진한 노란색이 간장 양념을 베이스로 한 진라면의 진한 맛과 연상되도록 라면 표지를 잘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매운 걸 워낙 좋아하여 진라면 순한맛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매운 라면을 못 먹는 경우가 많기에 오히려 진라면 순한맛 수출이 많다고 한다. 어느 날 회사 탕비실에서 누군가 진라면 순한맛을 먹으려 꺼냈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이런 진라면 순한맛 같은 놈이 있나. 이걸 왜 먹냐?’ 라고 장난을 쳤다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매운 걸 못 먹는 나에겐 순한맛이 딱 좋다. 짭쪼름 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위에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진라면 매운맛 같은놈’ 보다는 ‘진라면 순한맛 같은놈’이 훨씬 더 정감 있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진라면은 TV 광고에 여러 스포츠 선수들을 섭외하였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야구선수 류현진을 모델로 한 광고이다. 2013년에 오뚜기는 창립 25주년을 맞아 류현진을 섭외하였다. 류현진은 담담하게 ‘나를 채우는 건 진한 응원, 그리고 진한 진라면이다.’ 라는 멘트를 날리며 진라면을 호로록 먹는다. 그런데 마지막에 라면 면발이 너무 길어 호로록 호로로로로로로로로로록 먹는다. 일부러 그런 거였겠지만 라면 면발을 저렇게 오래 동안 흡입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운동선수라 폐활량이 좋은 걸까? 남편에게 한 번 해보라고 했더니 따라하다 사례가 걸려 버렸다. 그럼 그렇지. 류현진이니까 가능한 거야.
면발 흡입 실패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우리에겐 운동이 필요한 것 같다. 앞으로 라면을 몇 개나 더 먹어야 하는데 이런 허약한 기초체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폐활량을 늘리는 법을 찾아보니 전문가들이 스쿼트, 빨리 걷기, 수영, 자전거, 등산 등을 추천한다. 이건 이미 우리가 꾸준히 하고 있는 운동인데 어쩌면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