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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May 28. 2024

독서단식


얼마간 책을 무리하게 읽었더니 눈이 아파온다. 

아침에 일어나도 눈이 뻑뻑하다.

오른쪽 눈마저 시신경이 손상되어 녹내장 판정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평생을 책과 함께 살다 세상을 떠난 작가나 학자는 어떻게 눈 관리를 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눈에 아무 이상이 없었나?

시신경이 태어날 때부터 튼튼했을까?     

주말이라도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토요일 아침, 식사를 한 후 무의식적으로 물을 끓인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기 위해서다.

아차, 책 안 읽기로 했지.

현관에 놓인 신문을 가지고 들어오며 1면 제목만 읽는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남편이 기타치는 걸 구경하다 키보드 앞에 앉아 함께 악보를 맞춰본다.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란 곡이다.

남편이 듀엣곡으로 하면 좋겠다며 예전부터 연습하고 있었는데 난 이제야 쳐보네.

오랜만에 함께 연주하니 흥이 난다.     

연습을 다해도 여전히 오전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쓰다듬으며 제목을 천천히 읽어본다.

이제 뭘 해야 될까? 막막한 기분이 든다.

식물 잎을 한 장 한 장 닦아 주고 스트레칭을 하고 핸드폰으로 온라인 장을 보고 군고구마로 점심을 먹으니 12시.

산책이나 하러 가자.     

책 한 권 없이 빈손으로 나가려니 허전하다.

보호막이 사라진 기분.


수원 행궁동 길을 걷는다.

예전엔 한적한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 익선동처럼 동네가 싹 바뀌어 버렸다.

골목마다 카페와 식당이 빼곡하다.

담벼락에 장미꽃이 활짝 피어나 여기저기 사진 찍는 커플들로 북적북적.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 나오기를 기다리며 사람 구경.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카페에 와도 할 일이 없다.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 든다.

두 시간을 걷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이 화분에 물 주는 동안 집안에 버릴 물건이 없나 살펴본다. 

없다. 낮잠 잘 시간.

저녁 모임이 있어서 남편과 참석. 집에 오니 밤 10시다.

모임 덕분에 책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 다행이다.     


주일은 아침부터 바쁘다. 교회에 다녀오면 바로 낮잠을 잔다.

자고 일어나 빨래하니 오후 5시.

보통 때라면 소파에 누워 책을 읽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으니 산책을 해야겠다.

남편과 백운호수까지 걸어가 저녁 먹고 다시 집으로 걸어오니 9시.

씻고 나면 책을 읽다 잠이 들지만 역시 그럴 수 없으니 영화를 보기로 한다.

일요일 밤에 영화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영상은 독서만큼 눈에 피로를 주지 않는다.     


이틀간 책을 읽지 않으니 눈이 아프지 않아 좋다.

일요일만이라도 독서 단식을 해야겠다.

이틀은 무리다.

그동안 너무 책에 의존하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책 중독이 무섭다.

눈보다 책이 더 소중한 건 아닌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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