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티맵을 켠다. 초월 IC 부근 정체가 시작되었다.
이런. 아침은 가면서 먹어야겠네.
후다닥 샌드위치를 만들고 커피를 내린 후 가방에 넣어 출발.
막히지 않을 땐 원주까지 1시간 10분이면 되지만 지금은 30분이 더 걸린다고 뜬다.
다들 부지런하다.
초월 IC에서 극심한 정체를 몇 번 경험한 이후부터 주말에 그쪽 방향으로 가야 할 일이 있을 땐 이른 오전 혹은 늦은 저녁에만 이용한다.
오늘 첫 번째로 여행할 장소는 뮤지엄 산.
2013년 개관했을 때 방문한 이후 처음이다.
그때는 한솔 뮤지엄이었는데 다음해인가 이름을 바꾸었다.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을 보겠다고 버스를 타고 무료 셔틀을 갈아타며 찾아간 기억이 있다.
일찍 출발한 우리도 고속도로가 막혀 고생했는데 그보다 한 두시간 늦게 출발한 차들은 난리도 아니었나보다.
미술관 구경을 마치고 오후 5시쯤 마지막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느 가족이 헐레벌떡 티켓부스로 뛰어왔다.
직원이 당일 입장이 마감되었다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외치던 그들의 목소리.
“오전에 출발했는데 차가 막혀 이제 도착했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지켜보던 우리도 얼마나 안타깝던지.
산 속에 위치한 한솔 뮤지엄은 아름다웠다.
군더더기 없는 콘크리트. 돌. 물. 조각품이 산 속에 폭 안겨 있어서 건물 자체가 작품처럼 보였다.
원주를 지날 때마다 생각이 났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입장료 때문이었다.
매주 서울 현대미술관을 무료(수,토요일 저녁 6시 이후 무료)로 관람하던 시절이었기에 비싼 돈을 주고 굳이? 하는 심정이었다.
1시간 40분만에 미술관에 도착하니 9시. 오픈 시간은 10시다.
오크벨리 리조트 안에 있는 미술관이라 리조트 산책을 하기로 한다.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음료 한 잔을 손에 들고 조각공원을 걷는다.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예배당도 하나 있는데 멀리서 보면 독일 고성같은 느낌이 든다.
여유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바람이 불어 송진가루가 날린다.
주변이 고요하다.
조만간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네.
일인당 23,000원을 내고 기본권을 끊는다.
터렐 전시관과 명상관은 추가로 돈을 내야 한다.
미술관 인플레이션도 장난 아니군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키아프 아트 페어를 다녀왔다.
사전 접수하면 무료거나 만 원 정도만 내면 됐는데 조금씩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관람객도 해가 갈수록 많아지더니 작년에 가려고 보니 얼리버드 티켓을 6만원에 팔더라.
아, 이젠 돈 없으면 그림 구경도 못하겠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면 당장에 달려갔을 스웨덴 국립미술관 전시회도 티켓이 비싸 지금까지 망설이는 중이다.
뮤지엄 산은 외진 곳이고 입장료도 만만치 않아 한적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도 않다.
처음엔 관객이 적었는데 나갈 때쯤 되니 들어오는 사람이 많다.
남편이 속삭인다.
이 사람들 다 부자인가봐.
입구부터 라일락 향기가 짙게 풍긴다.
우리 동네는 일찌감치 라일락은 지고 아까시 향기로 뒤덮였는데.
스위스 현대 미술가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이 전시중이다.
<Burn to Shine> 이라는 주제로 40여점의 조각, 회화,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유리로 만든 시계와 조랑말, 수도승과 수녀 등 청동 조각 작품이 눈에 띈다.
빨강, 파랑, 주황, 노랑, 검정, 초록, 하양의 원색이 즉각적으로 마음에 박힌다.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은 백남준 홀에 서 있던 거대한 조각 작품 ‘노란색과 빨간색 수도승’
4미터 높이 조각이 9미터 높이의 천정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홀로 서 있다.
작품을 만나는 순간, 오길 잘했네 하는 생각이 든다.
미술관 안과 밖을 천천히 산책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원주에 살았다면 1년 회원권(15만원)을 끊고 매주 산책하러 왔을 텐데(남편이 에버랜드 1년 회원권이 더 낫지 않겠냐고 한다).
미술관 근처에서 솥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목향이라는 곳인데 괜찮더라. 여기도 찜.
오후에는 원주에 있는 책방(커피도 함께 파는) 세 군데를 가보려 계획했다.
책방 투어라고나 할까?
하지만 불행은 예고없이 찾아오는 법.
첫 번째 책방에서 제대로 펀치를 맞아버렸는데 그 이유는 말이죠.
책방에서는 ‘명연주 명음반’ 클래식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조용한 분위기. 인테리어도 구석구석 아름다웠다.
사장님이 목공을 하시는 분이라 나무로 만든 소품이 책과 잘 어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독서, 개인 공부, 노트북 사용 금지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응? 여긴 책방인데? 잘못 봤겠지 하며 들어갔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책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팻말 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도 독서를 자제해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사장님의 취지는 이랬다.
이곳이 자칫 북카페처럼 되어버려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불편해질까 걱정이라고.
이곳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책은 읽지 말아달라고.
글을 읽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카페를 방문했지만 책읽기를 금지하는 카페는 처음이었다.
그냥 카페면 그러려니 이해라도 하지.
여기는 책방이잖아요.
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차를 마시려는 건데 책을 읽지 말고 대화를 나누라니요.
그럼 혼자 오는 사람은요?
핸드폰만 해야 하나?
명상? 멍 때리기?
다른 사람 대화 엿듣기?
탁자에 앉아 창밖 풍경을 그리고 있던 남편에게 속삭였다.
여기, 책 읽지 말래. 빨리 그려. 다른 책방으로 가자.
가져온 책을 읽으며 천천히 커피를 마시려 했는데.
남편이 그림을 마무리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옆 테이블 얘기를 엿듣는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나누는 대화, 으스댐과 공손함이 오가는.
화난 마음을 달래며 다음 책방이자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문이 닫혀있다.
오늘은 쉬는 날도 아닌데. 이건 뭘까? 사장님이 아프신가?
오늘은 책을 읽지 말라는 신의 계시려나.
문 닫힌 책방을 보자 책방 투어 의욕이 뚝 사라진다.
원주는 자주 와봤기에 가보고 싶은 장소가 딱히 없다.
수변 공원을 걸으며 마음을 달래고 중앙 시장, 도래미 시장, 자유 시장을 구경했다.
상권이 많이 죽었다. 임대 현수막이 붙은 상점이 많다.
신도심인 무실동으로 이동해 저녁을 먹기로 한다.
젊은 친구들 어디 있나 했더니 다 여기 있었네.
나중에 원주 살게 되면 이 동네가 낫겠어, 어디 아파트가 제일 마음에 드니, 근데 원주는 바다가 없어서 생각해 봐야겠는데, 이런 얘기를 나누며 무실동을 산책한다.
튀김이 잔뜩 올라간 텐동을 먹으니 기분이 나아진다.
집에 도착하니 밤 8시. 오는 길엔 차가 막히지 않아 1시간 20분이 걸렸다.
좋고도 슬픈 원주 여행이었다.
독서 인구가 매년 놀라운 정도로 줄고 있다는 통계도 안타까운데, 책방까지 독서를 방해할 줄은 정말 몰랐네.
‘나는 마치 일기를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계절, 하루, 시간, 풀잎 소리, 파도 소리, 일몰, 하루의 끝, 그리고 고요함까지.’ 우고 론디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