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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n 06. 2024

안전지대


아침마다 KBS 클래식 FM 방송을 듣는다.

몇 년 전 ‘출발 FM과 함께’ 진행자가 이재후 아나운서로 교체되었을 때 나처럼 오랜 애청자인 난범 언니를 만나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했다.

아침부터 너무 방방 뜨는 거 같지 않아? 차분하지도 않고 말도 못하고. 가벼워서 집중이 안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에게 폭 빠져버렸다.

아침부터 너무 신나지 않아? 유머 있고 능청스럽고 말도 잘해. 재밌어서 자꾸 집중하게 돼.


이재후 아나운서는 한 달만에 나와 언니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예전에는 음악만 들었다면 이제는 진행자 멘트도 귀담아 듣는다.     

월요일에 이재후 아나운서가 오프닝 멘트로 던진 말이 마음을 탁 두드렸다.

“미국작가 닐 도널스 월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당신이 안전지대 밖으로 나올 때 시작된다.”


안전지대. 지금 나는 안전지대에서 살고 있다.

매년 새로운 걸 도전하고 실패한다.

일 년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후 그만 둔지 몇 달이 지났다.

몇 달째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주일만이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하지 못했던 행동이 뭐가 있을까?

절대 못 먹는다고 단정해버린 음식을 시도할 수 있을까?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던 일들 혹은 용기내지 못해 지금껏 미뤄왔던 일들은 없나?     


살아온 삶이 궁금한,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당근에서 백화점 판매직 단기 알바에 지원서를 넣기도 했다.

실패할 가능성이 컸고, 실패하면 잠시 움츠러들지도 모른다.

결국엔 안됐지만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실패의 다른 말은 시도이고 이것저것 시도하다보면 간혹 되기도 하니까.     


이번엔 새로운 음식 도전. 양꼬치를 먹어보기로 했다.

생선회나 곱창을 떠올려 봤지만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양 갈비를 맛본 경험은 두 세 번 있으니 먹다가 뱉어버리지는 않겠지.

부모님 댁 근처에 늘 대학생들로 붐비는 양꼬치 집이 있다.

그곳에서 도전해 보기로 한다.


남편은 미리 경고한다. 향이 좀 날 거라고.

양꼬치 10개에 16,000원.

나는 한 개밖에 못 먹을 게 분명하므로 짬뽕탕과 탕수육도 함께 주문한다.

화로 위에 올려진 양꼬치가 자동으로 이리 저리 움직이며 구워진다.

와. 신기하네. 이런 장치가 있다니.


닭꼬치처럼 노릇노릇하니 먹음직스럽다.

젓가락 두 개로 나무 꼬챙이를 위에서 아래로 밀면 접시 위로 고기가 툭툭 떨어진다.

큐민가루, 고춧가루, 소금, 조미료. 후추를 섞어 만든 쯔란 소스에 고기를 살짝 찍어 먹는다.

태어나 처음 맛본 양꼬치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했다.     


뭐야. 맛있잖아. 그냥 맛있는 게 아니고 진짜 맛있잖아.

향 안나냐고? 안 나는데. 가루 소스에 향이 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맛있는 걸 여태 자기 혼자 먹은 거야?

이 집이 다른 데보다 고기가 부드럽고 잡내가 없는 것 같다고?

장난해? 이 정도 맛이면 다른 데서도 충분히 먹겠는데?

지난 세월이 억울하다. 삼겹살만큼 맛있어. 양꼬치 다 내꺼. 자기는 짬뽕탕 먹어.

다음 주에 다른 양꼬치 집 가서 여기랑 비교해보자.

    

절대 못 먹을 줄 알았던 음식 시도는 성공했다. 신이 난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니 즐길 수 있는 영역도 한 뼘 더 확장되었다.

‘출발 FM과 함께’ 덕분에 불에 구운 양꼬치 맛을 알게 되었다.

이제 누군가 양꼬치 먹으러 갈래? 묻는다면 좋지!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인생은 안전지대 밖으로 나올 때 시작된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느껴진다면 삶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젊을 때는 생애 최초로 해보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매일 매일 얼마나 불안하고 신나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삶에 주도권이 생기고 사는 게 능숙해진다.

그만큼 가슴 뛰는 일도 줄어든다. 예전에 다 해봤으니까.

가끔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도전할 만한 새로운 것이 있을까?         



** 방금 다른 양꼬치 집에서 양꼬치를 먹고 왔다.

맛있다고 소개받은 곳이다.

양꼬치를 한입 먹자마자 남편이 내게 경고했던 의미를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양꼬치를 먹을 수 없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양꼬치는 오직 부모님댁 근처 식당뿐이다.

거기서는 미리 양념에 재운 고기가 나온다.

다른 데서 나오는 양꼬치는 생고기다.

내가 좋아하는 건, 양고기 냄새를  모두 제거한 양꼬치일 뿐이다.


 

인생의 불확실성과 미지의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통제력을 상실한 가능성에 대한 공포,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여온 자동 재생되는 편견과 습관을 계속 가동하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의식에 자동 저장된 그 프로그램을 삭제할 때만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설의 쓸모> 박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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