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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n 11. 2024

여름 준비


여름 준비를 마쳤다.

귀찮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뤘던 겨울 코트를 세탁소에 맡겼다.

롱코트 한 벌 세탁 비용이 2만원인 시대를 맞이했다. 

20만원이 적힌 세탁 청구서를 보자마자 커튼이 떠올랐다.

몇 년에 한번 커튼 손빨래를 해오다 작년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세탁소에 처음 맡겨보았다.

신데렐라가 되어 돌아온 커튼의 총 세탁 비용은 32만원이었다. 

20대에 자취할 때 냈던 월세 비용을 세탁비로 내며 반성했다.

내년부터는 커튼 뿐 아니라 코트도 손빨래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을옷과 겨울옷은 작은 방 옷장으로, 봄옷과 여름옷은 완전히 안방 옷장으로 이동했다.

작년에 한 두 번 입은 옷, 올해도 한 두 번 입고 말 것 같은 옷 몇 벌을 과감히 수거함에 넣었다. 

하얀 식탁보를 테이블에 깔고 다리미질을 했다.

시각적으로 시원하게 느껴지도록 가죽 소파 위에도 하얀 천을 덮어 주었다.

하얀 국화 한 다발을 사서 꽃병에 꽃아 주었다.     


선풍기를 꺼내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주었고 에어컨 필터도 물에 씻어 말려 주었다.

부엌 찬장에 있던 플라스틱 통 몇 개와 유통기한이 지난 부침가루를 버렸다.

남편이 빵에 넣겠다며 주문했던 건포도와 계피가루도 기한이 다해 휴지통으로 보내주었다.

페퍼민트, 스킨답서스, 나비란, 콩란을 잘라서 플라스틱 컵에 새로 심어 주었고 거실과 베란다에서 키울 식물들 위치를 정리했다.      

다이소에서 곰팡이가 싹 없어진다는 세제를 구입해 거뭇해진 줄눈 근처에 바르고 3시간 후 물로 씻어내고를 3번 반복했다. 광고는 거짓이 아니었고 욕실은 처음 이사왔을 때처럼 깨끗해졌다.


누군가에게 물건을 받을 때마다 포장지로 따라왔던, 각종 단체 이름이 프린트 되어 있던 장바구니와 에코백을 모두 모아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현관 앞에 정물처럼 서 있던 자전거 두 대와 각종 부속품을 동생에게 주었고, 입은 날보다 입지 않은 날이 더 많은 쫄쫄이 요가복(왜 이리 많이 샀던걸까...)을 수거함에 넣었다.

탑 라인을 실로 꿰매 신었던 운동화도 정리했다. 뒤꿈치 축이 무너져 더 이상 고칠 방법이 없다. 

식탁 옆에 있던 사이드 테이블을 버렸고 화분 두 개를 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서랍에 있던 각종 유심을 잘라 버렸고 물건 하나를 당근에 팔았다.


대학원 때 철학 수업에서 구입했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원서를 버렸다. 

청강이었고 철학과 학생과 교수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몽롱한 상태로 앉아만 있던 수업이었다. 

수업 이후 한 번도 펴본 적 없고 앞으로도 펴볼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지만, 거의 10만원을 주고 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끝끝내 살아남았던 책이었다. 

올 여름엔 네가 선택되었단다.     


여름이 오면 가벼운 옷차림이 어울리듯 집도 가벼움이 필요하다.

공기가 통하도록 짐을 덜어내고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한다.

세탁실이나 팬트리를 청소해서 날파리와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한다.

습도가 높아지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군살을 빼주면 좋다.

한여름이 오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도록.


한낮에는 덥긴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망종 무렵이 여름 준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다.

청소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은 비치보이스의 코코모 혹은 패티 스미스의 레돈도비치.

기분이 좋아져 꼭 필요한 물건까지 버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승진과 출세성공과 사회적 지위를 생각할 때 다른 누군가는 식사와 설거지청소와 빨래를 고민한다누군가가 바깥에서 중요하고 대단한’ 성취를 이루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집 안에서 하찮고 사소한’ 일을 감당한다전자는 후자에게 빚진다후자는 전자에게 기여한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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