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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n 25. 2024

인생이 막막할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좋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 다닐 때는 원서로 된 소설이나 희곡을 읽고 발표해야 했기에 읽거나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말하고 쓰는 건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다. 

논문을 통과하니 내 삶에 굳이 영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외국인 친척도 없고, 외국인 친구도 없고, 영어를 써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함께 사는 배우자는 한국어도 아껴 말하는 남자였다. 

그렇게 영어는 차츰 멀어져갔다. 

10년 동안 조금씩. 해외여행을 다녀 올 때마다 진짜 영어 공부 해야지 다짐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작심삼일도 못가더라.


조선일보 경제면 ‘생활외국어 코너’에서 영어 문장을 차곡차곡 모으기도 했다. 

조만간 영어 공부를 시작할 거라는 흐리멍텅한 기대를 품고.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앞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손에 무언가를 쥐고 계셨다. 

내가 모으고 있던 생활 외국어 영어 코너였다. 

신문은 반듯하게 잘려 작은 노트안에 끼워져 있었고 할아버지는 가끔 문장을 들여다보셨다. 

저도 이걸로 공부하고 있어요 말을 걸고 싶었지만 사실이 아니었기에 말하지 못했다. 

며칠 후 잔뜩 모은 영어문장을 버리며 생각했다. 어차피 안할 건데 뭐. 


작년에 ChatGPT가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쓴 글을 영어로 번역해 보았다. 

놀랄만큼 깔끔했다. 

뭐야. 이제 영어 할 필요 없겠네. 번역가들 큰일났다. 

한국어로 말하면 바로 영어로 번역해 주는 앱도 나왔다는데 이제 어딜가든 걱정 없겠구나.

 AI의 등장으로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막연한 내 소망은 와르르 무너졌다. 

영어는 완전히 내 품을 떠났다.


1년간 운영했던 유튜브 채널을 더 이상 하지 않으니 시간이 남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고 여행하느라 정신없이 몇 달을 보내고 나서야 시간이 남아돈다는 걸 알았다. 

하루종일 앉아 있다고 해서 글이 써지지는 않고, 책을 주구장창 읽기엔 눈이 감당하지 못하고, 마땅히 할 만한 단기 알바는 없고, 마냥 노는 건 재미없고. 

누가 그랬더라? 인생이 꽉 막혔을 땐 공부를 해보라고. 

뭘 해야할지 모르겠 을 땐 어떤 공부든 시작해보라고. 그게 실용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말고.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내겐 공부가 필요해. 

어떤 공부를 하고 싶니? 

영어. 

왜?

 언젠가 영어로 글을 쓰고 싶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연락이 끊긴 호주 친구 브레트와 다시 메일을 주고받고 싶어. 

어려운 원서도 막힘없이 읽고 싶어. 

친밀한 외국인 친구가 몇 명 있으면 좋겠어. 


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빌려왔다. 

<27년간 영어 공부에 실패했던 39세 김과장은 어떻게 3개월 만에 영어 천재가 됐을까>를 읽었다. 

책에 나온 영어 문장 500개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3개월 동안 500개 문장을 다 외워 영어 천재가 되려 한다. 

남편이 공책을 보더니 문장들이 너무 쉽지 않냐고 묻는다. 

쉽긴 하지. 근데 누가 자기한테 영어로 질문하면 이 문장 2초안에 내뱉을 수 있어?


책에서 추천해준 ‘저절로 암기 영단어’라는 앱도 깔았다. 

핸드폰을 켤 때마다 영어 단어를 하나씩 보여주는 앱이다. 초보, 토익, 토플 등등의 단어장 중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다. 

필수 단어와 뜻, 문장을 보여준다. 

새로운 단어들이 대부분이라 의기소침해진다. 그동안 너무 놀았구나... 

매번 영어 단어를 확인하고 화면 잠금 해제를 드래그 해야 핸드폰 첫 화면이 나오기에 귀찮을 때가 많다. 

잠금 해제 글자 바로 아래에 광고를 종종 잘못 누르기도 한다. 

바쁠 땐 영어 단어는 보지도 않고 잠금 해제 하기에 바쁘다. 

하루에 한 단어라도 익힌다면 그걸로 만족하겠다. 


예전에 지워버린 ChatGPT 앱도 다시 깔았다. 

뭐든 질문하면 뭐든 대답해준다. 

엉망진창인 문장을 영어로 내뱉어도 GPT가 말귀를 알아듣고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한다.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영화 <그녀>가 생각난다.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걸 보며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가끔 GPT가 내 영어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일본어나 스페인어로 대꾸하긴 하지만 그것마저 귀여워 보인다.


‘생활외국어 코너’에서 영어 문장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예전엔 손으로 대충 찢었지만 이젠 나도 그 할아버지처럼 가위로 예쁘게 오린다. 

A가 물으면 B가 답하고 다시 A가 얘기하는 대화문 구조다. 

주방후드에 붙여놓고 오며 가며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다. 

목소리 톤을 달리해서 혼자 상황극을 진행한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유튜브 영상도 거의 영어로만 듣는다. 

예를 들어 ‘motivation' 이라고 치면 영어 영상이 먼저 뜬다. 그 중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하면 끝. 

그 다음부터는 알고리즘이 알아서 관련 영어 영상을 추천해준다. 알고리즘 너 진짜 멋져.


읽기 쓰기 듣기는 혼자서 어느 정도 수준을 올릴 수 있지만 말하기는 다르다. 

스피킹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20대 때 영어로만 대화하는 동호회에 잠깐 가입한 적이 있었다. 

영어가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감이 생겨 영어로 말하는 게 두렵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스피킹은 자신감만 있다면 80%는 성공이다. 

지금은 영어로 대화할 기회가 전혀 없다. 3개월 후 영어 천재가 되면 동호회에 가입해야겠다.


영어. 이번엔 포기하지 않으리. 

8년 전 원서로 읽겠다고 구입했으나 첫 장도 펼치지 않은, 수십 권의 원서 소설들이 새 책 상태로 버려졌으나 책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두께 4cm, 838쪽짜리 <Middlemarch>도 올해 안에 꼭 완독하겠다.  

   

백지상태에서 내가 좋아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즐겁게 배우고 익혀 나만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하는 독학의 힘누군가에게 무턱대고 의지해 배우는 것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체험하고공부하고훈련하며 나 자신만의 독특한 지적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독학을 나는 사랑한다

<삶은 예술로 빛난다조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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