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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n 21. 2024

말하는 사람 쓰는 사람


핸드크림이 비누에게 말했어.

“더럽고 지저분한 손들이 널 만져서 싫겠다. 날 사용하는 사람들은 항상 손이 깨끗하던데.”

비누는 그 말에 상처를 받았어. 

얼룩지고 오염된 세상을 정결하게 만들어가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고 있었거든.

핸드크림이 말한 뒤로 비누는 사람들이 자신을 만지는 게 싫어졌어.

그래서 집을 나가버렸지.     


사람들은 비누로 손을 씻지 못했기에 핸드크림도 바를 수 없었어.

그제야 핸드크림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단다.

비누가 없으면 나도 잊히겠구나.

핸드크림은 비누를 찾아 나섰어.     


올리브영을 기웃거리고 다이소 문도 열어봤지.

비누는 아무데도 없었어.

큰일났네. 어디로 갔지?

한참을 돌아다니다 지칠 무렵, 핸드크림은 어느 매장 안쪽에서 거품 목욕을 하고 있던 비누를 발견했어.


“비누야. 너 러쉬였구나. 이렇게 귀한 비누인줄도 모르고. 내가 잘못했어. 네가 없으니 사람들 꼴이 엉망이야. 집으로 돌아와 줘.”     

핸드크림은 비누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어.

비누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고 핸드크림도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지.


핸드크림이 비누에게 말했어.

“사람들 손을 깨끗이 씻겨줘서 고마워. 사람들이 깔끔한 손으로 나를 만지는 건 너 덕분이야.”

비누는 그 말에 미소 지었단다.     



남편이 아침을 먹다 말고 얘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핸드크림과 비누가 살았는데~

처음엔 진지하게 귀 기울였지만 비누를 찾아 올리브영으로 갔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남편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남편은 뜬금없이 동화를 지어낼 때가 있다.

글 쓰는 사람은 난데 상상력은 남편이 가지고 있다.


나는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면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공상이나 상상을 즐긴 적이 없다.

남편이 이야기를 지어낼 때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든다.     


- 자기가 글을 써보는 건 어때?

- 글은 너가 써야지. 난 그림 담당이잖아.


카버의 인터뷰를 모아놓은 책 <레이먼드 카버의 말>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970년대 중반에 카버는 미줄라에 사는 작가 친구들을 찾아갔다고 한다. 

작가 네 다섯 명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가 린다라는 술집 종업원에 관한 에피소드를 꺼냈다. 

그녀는 남자친구하고 술을 마시다 취한 나머지 침실 가구를 몽땅 뒷마당에 내놓았다고 한다. 카펫, 전등, 침대, 협탁 모두. 


이야기가 끝나자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서, 이 얘기 누가 쓸 거야?” 

카버는 누가 그 이야기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는 썼다고 한다. 

한참 뒤에. 5년쯤 지난 후. 이것저것 바꾸고 더해서 단편으로.     

 

남편은 실컷 동화를 풀어놓더니 다시 과일을 먹기 시작한다.

나는 남편이 뱉은 말을 머릿속으로 주워 담으며 문장을 다듬는다.

상상을 못하면 부지런히 받아 적기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현실세계에 기반한 허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당연히 내가 쓰려던 글은 위대한 소설들이었지만순전히 상상의 천으로만 짜낸 이야기를 전달하는 재능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일찌감치 깨달았다그런 이야기를 써보려고 할 때마다 일말의 문학적 가치도 건질 수 없는 장황한 언어의 진흙탕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은 일비비언 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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