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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n 20. 2024

길고도 긴 휴가 계획


- 디데이 77일밖에 안 남았네.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다음 주부터 계획을 세워야겠어.

- 자기야. 남들 보면 시험 준비하는 줄 알겠어. 

    

발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발리는 4년 뒤 남편 휴직 기간에 가려고 생각했던 장소다.

휴가를 제주도에서 해외로 바꾸기로 하고 안 가본 도시를 찾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발리를 가면 4년 동안 5천만원 모으는 게 실패할지 생각해봤다.

그렇지는 않다. 다만 올해 남은 6개월을 아껴 살아야 한다.     


여행을 떠나려면 3개월이나 남았는데 남편은 이미 신이 났다.

리조트에서 매일 수영을 해야 하니 이제부터 뱃살 관리를 하겠다며 밤 산책을 시작했다.

- 그렇게 해서 살이 빠질까?

- 뭐라도 해야지

그런 천진함이 좋다. 오래 오래 때 묻지 않길.


남편은 발리 날씨와 습도를 체크하고 호텔 특가를 찾아본다.

발리에서 먹어야 할 과일, 술, 커피를 검색한다.

우리가 방문할 시기에 먹을 수 있는 제철 과일은 용과와 패션 프룻트고 꼭 마셔봐야 할 술은 아락이며 커피는 자바라고 알려준다.          

남편은 예전부터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말했다.

다음에 어디를 갈지 정하고 미리 비행기표를 예약하면 일 년 내내 행복하지 않겠냐고. 

그래? 나는 여행이 코앞에 닥쳐야 마음이 설레는데?

그동안 귀 테두리로 듣고 흘렸지만 올해 처음으로 남편 말이 이해된다.


비행기를 타려면 77일이나 남았지만 여행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발리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이고, 꼭 가보고 싶던 도시이며, 4년 뒤에나 가보겠거니 체념했는데 갑자기 가게 되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인생에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살다보니 그런 건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고,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상이 곧 내 인생이기에 ‘오늘’에 기쁨을 느끼며 살려고 해서일까?     

비행기티켓 한 장으로 3개월 동안 ‘매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소환할테니 말할 것도 없고.

미리 행복 심어두기. 꽤 괜찮은 방법이다.     


‘휴가’ 라는 단어는 옛날에는 훨씬 무게감이 컸다.

30년 전만해도 전 국민의 휴가 시즌은 딱 정해져 있었다.

7월 말에서 8월 초.

모든 학교와 학원이 그 주에 문을 닫았고,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초등학생 때 아버님은 공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공장도 딱 그 시기에 맞춰 쉬었다고 한다.

일주일도 아닌 삼일.


각자 쉬는 게 아니라 전 직원이 다함께 여행을 떠나는 휴가였다. 

회사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했고 모든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차에 올라탔다.

대전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해 고속도로를 타면 경주까지 2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경주에서 포항까지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이라 길이 국도밖에 없었다.     


좁은 도로를 달려야 했는데 길 위에는 휴가를 떠나는 전 국민 자동차가 함께 있었다는 거.

버스는 도로 위에 멈춰 버렸고 답답한 어른들은 차에서 내려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는 거. 

길가에 있는 나물도 뜯고 얘기도 하며 천천히 걸어갔지만 버스는 여전히 꼼짝도 못했다는 거.

버스 냄새에 민감하고 멀미를 하던 어린 남편은 차에서 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 실신 상태로 누워 있었다는 거.

거북이처럼 기어서 포항에 도착하면 밤 9시가 되었다는 거.

회사에서 숙소를 따로 예약해 준 게 아니라서 다들 집에서 가지고 온 텐트를 주섬주섬 설치하기 시작했다는 거.

밤 10시가 되어서야 온 가족이 비좁은 텐트 안에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다는 거.


다른 회사에서 온 팀들이 노래방 기기를 틀고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댔기에 잠들 수 없었다는 거.     

다음날이 되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일어나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거.

밤에는 술 먹고 떠드는 어른들 목청에 또다시 잠들 수 없었다는 거.

그 다음날 오전이 되면 텐트를 접고 고속버스에 올라탄 후 다시 대전 귀향길에 올랐다는 거.


그 다음 해가 되면 회사에서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휴가를 떠나는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었다는 거.

전 국민이 바다가 아닌, 바다로 가는 도로 위에서 뻥튀기를 먹으며 휴가를 보냈다는 거.

휴가가 맞나 싶지만, 아버지는 일 년에 딱 한번 회사에서 주는 그 휴가를 간절히 바랬다는 거.

아버지 뿐 아니라 전 국민도 일 년에 딱 한번 쉬는 그 휴가를 놓칠 수 없어 바리바리 짐을 싸서 길을 나섰다는 거.

그럼에도 그들은 고생만 잔뜩하고 돌아오는 여름휴가를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는 거.     


지금은 노동 여건이 개선되어 회사마다 휴가 일수도 늘어났고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쉴 수 있는 분위기다.

휴가의 중요성이 예전보다는 가벼워진 기분.

나 역시 살면서 간절히 휴가를 바랬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년 내내 쉬지도 못하고 일했던 적도 없고, 원하면 언제든 짧은 여행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도를 바꿔 앞으로는 ‘휴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려 한다.

남편이 직장인으로 있는 동안에는 긴 여행을 떠나는 건 일 년에 한번뿐이니까.

남편 텐션에 맞춰 함께 춤을 춰야지.

남편이 뱃살 관리를 위한 산책을 가자고 하면, 이미 헬스장 트레드밀에서 충분히 걸었지만, 기꺼이 따라가겠다. 

링크로 보내주는 숙소와 관광지도 관심있게 살펴보겠다.

남편이 아침저녁으로 발리 얘기를 꺼낼 때마다 즐겁게 맞장구치고. 쿵덕 쿵덕. 

발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내년 휴가지를 의논해야겠다.

내년을 기다리며 우리는 매일매일 두근두근 할테고, 와. 이거 완전 남는 장사네.      

    

여행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압축되어 하나하나가 특별한 시간으로 기억된다인상적인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면서 확장되고 증폭되기 때문일 것이다영화를 처음 볼 때는 순식간에 100분이 지나가지만 인상적인 영화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리플레이하면 영화 속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여행의 시간김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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