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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l 24. 2024

마음을 가꾸는 일


라디오에서 눈 수술을 했다는 시청자의 사연을 들었다. 어떤 수술인지는 모르겠다. 

사연을 듣자마자 만약 나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언젠가 시력을 잃게 된다면?      


우습게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남편이 내 옷 취향을 정확히 알도록 미리 훈련을 시켜야겠구나 하는 거였다. 

더이상 직접 옷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어떤 재질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느 부분에 디테일이 들어가야 하는지, 색감과 무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쇼핑몰을 둘러보며 몇 번이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사고가 아닌 이상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 경우보다 천천히 시력을 잃을 확률이 높으니 그 전에 점자도 배워둬야 한다. 

비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을 듣고 점자로 책 읽는 연습을 해 놓아야지. 

헬스장 트레드 밀에서 미리 눈 감고 걷는 연습도 해야 한다. 

운동 기구 사용은 쉽게 적응할 것 같다. 


계좌이체와 주식투자는 어떻게 하지? 음성 서비스가 세세하게 지원이 되는지 모르겠다. 

해당 기능이 없으면 가능한 앱을 만들어달라고 여기저기에 요구해야겠다. 

요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과일 껍질은 벗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불 조절이 어려울 수 있겠구나. 인덕션으로 바꾸면 되려나? 

운전은 못할 테고, 미술관에서 그림 감상도 어렵겠구나. 

그렇다면 그전에 보고 싶은 그림을 모두 눈에 담아둬야겠네. 전 세계 미술관 투어를 떠나야할지도. 

피아노 치는 건 가능하겠고 음악을 듣는 귀는 훨씬 섬세해지겠지.     

영화 감상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소리만 듣고도 즐길 수 있을까?


사연이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몇 분 동안 이런 생각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절망이나 슬픔에 관한 상상이 아니었기에 스스로도 뜻밖이었다. 

시신경 손상이 있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시력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잘 관리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혹여나 미래에 시력을 잃는다면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순식간에 떠올랐던 생각들이 대응에 초점이 맞춰 있어서 다행이었다.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라는 영화가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 전쟁이 끝나고 귀향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여러 주인공 중 호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항공모함 화재로 팔꿈치 아래 양손을 잃은 청년이다. 

갈고리 의수를 찬 호머는 갈고리로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젓가락 행진곡을 연습한다. 

갈고리 손으로 서류에 서명을 하고 맥주잔을 들고 마시며 평범하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불구자로 의식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담담히 대해 주기를 원할 뿐이다. 


호머 역을 맡은 해롤드 러셀은 실제 2차 세계대전 때 육군 교관으로 복무하던 중 폭발물 사고로 양 손을 잃었다. 

전문 배우가 아니었기에 아카데미 측은 그에게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여했다. 

연기는 훌륭했지만 수상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하나의 역할로 두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가 되었다. 


극 중에서 호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인다. 

분노하지 않고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낙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는 호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그 누구를 탓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기에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했을 뿐이다. 


위기를 만났을 때 마음(정신)이 튼튼하다면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물질과 건강한 육체에 과한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마음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외적인 부분은 인풋과 아웃풋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운, 환경, 유전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내면은 단련할수록 조금씩 자라난다.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는 느낄 수 있다.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큰 시련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걸. 

마음을 돌보고 가꾸다보면 언젠가 그 사랑을 돌려받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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