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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l 25. 2024

여름 휴가 때 읽을 책은 신중하게


평창에 다녀왔다. 에어컨이 아닌 자연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기엔 평창만한 지역이 없다. 숙소가 성수기 요금으로 바뀌기 전에 가야했다.

이미 성수기에 들어선 리조트도 많았다. 가려고 했던 리조트 가격은 올라버렸다.

인터컨티넨탈 호텔도 막 비싸지려던 참이라 얼른 예약했다.

이 호텔에서 숙박은 처음이었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산장 같은 분위기라 늘 지나치기만 하던 곳이었다.


체크인 할 때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직원들이 친절했다. 오가는 직원들 몇 명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뭐야. 외국에 온 거 같잖아.

로비에 있는 라운지도 쾌적했다. 멜론 빙수가 5만원이라 흠칫 놀라긴 했지만 글라스 와인은 1만 3천원이라 마음을 놓았다.

객실은 낡았지만 깨끗했다. 욕조는 넓었고 내부는 조용했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들어왔다.습도가 느껴지지 않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저녁에는 쌀쌀해서 창문을 꼭 닫고 이불을 목까지 올린 채 잠을 자야 했다.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이틀 동안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설국>과 <밀크맨>이었다.

 <설국>은 여름 휴가 때 읽으면 딱 좋을 소설이었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장을 읽으며 발가락을 만지작 거리고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맑은 인상을 간직하는 방법이 있을지 생각했다.

<밀크맨>은 처음부터 끝까지 밀도가 높았다.

휴가 때 읽기엔 적절하지 않은 책이었다.


‘그런 건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다 의 영역이었다. 이는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성인 여자가 성인 남자에게, 여자아이가 성인 남자에게 그런 말을, 적어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자주 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남자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남자의 뜻을 따르는 대신 남자의 말에 반박하는 여자, 버릇없는 여자, 오만하고 자신감이 지나친 여자는 봐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문장을 읽다보면 숨 쉬는 게 힘들어졌다.

<밀크맨>을 읽다 마음이 답답해지면 <설국>을 펼쳤다.

문제는 <밀크맨>이 492쪽이고 <설국>은 152쪽이라 비율이 맞지 않았다는 거다.

<밀크맨>을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 <설국>을 끝내고 말았다.

만약을 위해 여분으로 가져온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였다.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 책도 휴가 때 읽기엔 적절하지 않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당신은 나에게,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소? 새치름하고 뻣뻣하다고까지 알려져 있고, 지인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수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분위기가 난잡하다는 이유로 디스코텍에 가기를 꺼리고 남편이 ‘치근댄다’는 이유로 이혼한 당신이 이 괴텐이라는 자를 그저께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날로,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의 아파트로 데리고 가, 거기서 아주 급속도로, 말하자면 비밀스러운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겠소?”


책을 읽다보면 카타리나 블룸이 당해야 하는 상황에 수시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월정사와 국민의 숲을 거닐며 말랑말랑 부드러워졌던 마음이 숙소에서 책을 읽다보면 다시 딱딱해졌다.

왜 아무 생각 없이 이런 화나는 책을 가져왔을까?

남편이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이었다.

이 책이야말로 여름 휴가 때 읽으면 좋은 최고의 소설이지만 나는 평창에 오기 직전엔 읽었다.

아직도 문장들이 생생하다.

책을 더 가지고 와야 했다. 여분의 여분의 여분의 책까지 가지고 와야 했다.

남편은 자기가 들고 있는 책의 가치를 잘 모르는 듯했다.

책 읽는 시간보다 조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 문장들이 그만큼 평화롭고 아름답긴 하지.


신문에서 괜히 휴가철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는 게 아니다.

휴가지에서 읽어야 할 책은 따로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파란 바다를 보며 기분 좋은 순간을 누리고 싶다면 책을 고를 때 반드시 스토리를 확인하길 바란다.

 <밀크맨>은 다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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