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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책 읽지 않아도

by 유자와 모과
삿포로.jpg


한 달 동안 읽은 책이 네 권이다.

내 기준으로 보면 이건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한달 전 도쿄 여행을 떠날 때 읽을 책을 가져가지 않았다.

1박 이상 여행을 떠나며 책을 챙기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좋은 계절이니 사람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대신 고개를 들어 거리 풍경을 보았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곳곳에 있었다.

연못도 보고 나무도 보았다.

인형이 포도알처럼 달린 학생들의 가방을 구경했다.

게다를 신고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도 바라보았다.

스타일리쉬한 옷차림마다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흘렀다.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글을 읽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희망 도서를 찾아가라는 도서관 문자가 와 있었다.

집에 와서도 책을 펴지 않았다.

때맞춰 온 여름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풍경 소리를 들었고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해가 나면 빨래를 널었고 다리미질을 했다.

홍차를 마시며 가만히 새소리를 들었다.


2주 후 삿포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가방 안에는 옷가지뿐이었다.

삿포로는 소박했다.

시선이 머물만한 건축물이나 공원이 없었다.

사람들도 수수했다.

이를 어쩌지. 책을 가져왔어야 했나.

다행히 삿포로엔 디저트가 있었다.

쿠키와 케이크, 아이스크림 등 스위츠가 놀랄만큼 세분화되어 있었다.

백화점 식품관이 삿포로 구경거리였다.

디저트에게 감탄하고 경의를 표하느라 책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 년간 책 읽지 않기 프로젝트를 하면 어떨까?

예전엔 신간이 나올 때마다 저걸 어서 머릿속에 축적해야 하는데 하는 조급함이 많았다.

이제야 책 욕심을 살짝 내려놓는다.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책 고르기도 신중해진다.

일 년에 백권을 정독한다고 하면 십 년에 천 권이다.

팔십세 중반까지 독서가 가능하다면 앞으로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고작 사천 권 밖에 남지 않는다.

예전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살 날이 훨씬 많았으니까.

이젠 시력도 시간도 소중하기에 함부로 덤빌 수 없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건 말건 모과는 500쪽에 달하는 <시핑뉴스>를 열심히 읽는 중이다.

한때는 모과의 독서 이력을 얕보기도 했다.

러시아 소설쪽은 이미 나를 넘어섰다.

내일은 도서관에 가야겠다.

사람 구경하기 좋은 계절은 지나갔다.

책 읽기 좋은 장마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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